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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레 Jun 08. 2023

그렇게 집사가 된다 - 2

인의예지가 없네 진짜


 이럴 수가, 잔뜩 긴장한 채로 메시지를 보냈건만 답장이 없군요. 그렇다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한 번에 받으셨지요. 보호소나 주변에 고양이를 임시보호하는 분들, 혹은 학교 고양이 돌봄 동아리에라도 연락을 해 보라시더군요.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컥 함께 사는 것은 고양이한테나 저한테나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확실하게 고양이가 저와 같이 살고 싶어 한다면 공부를 많이 하고 하나씩 준비를 해 나가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도 저를 낳고 나서 육아에 대해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배워 나갔다고 하시면서요. 또 저를 믿고 들어온 고양이를 억지로 내치거나 하지는 말라고 당부하시더군요. 일단 오늘 밤을 보내고 다시 알려드리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시 그녀에게 메시지를 연속으로 보냅니다. 알림을 계속 울려서라도 이 상황을 빨리 공유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답장은 없고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상황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것이었을까요.




 제가 전전긍긍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고양이는 싱크대 위에도, 탁자 위에도, 책상 위에도 올라가서 제 물건들의 냄새를 맡고 앞발로 툭툭 건드려 보고 있었지요. 뭐라도 무너뜨리거나 떨어뜨리는 것은 아닐까, 저 작은 것이 다치기라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그저 기우였답니다. 온통 흙먼지 가득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물건들에 부비적부비적 얼굴과 몸을 비비는데, 여기는 이제 내 집이니 그렇게 알라고 여유롭게 선언하는 것 같았지요. 아무 이상 없이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침대로 가더니 궁둥이를 붙이고 얌전히 앉았는데, 이제는 졸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긴장이 풀렸다고 하더라도 저대로 잠들어서는 안 됩니다. 몸에 앉은 때를 조금이라도 씻어 내야 했고, 무엇보다도 오늘 초면인 녀석이 제 침대 위에서 자려고 하다니요. 그것은 선을 넘는 일입니다. 마침 집에 함지박이 있었으니 거기에 따뜻한 물을 담으면 될 테고, 친환경 수제비누를 조금 풀어 거품을 내면 되겠거니 생각을 하고 화장실로 갔습니다. 온도를 맞춰 물을 받고 나왔는데, 고양이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아예 자리를 잡았더군요. 강아지는 안아 봤어도 고양이는 한 번도 안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녀석을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갈까요. 결국 눈 딱 감고, 겨드랑이 쪽에 손을 밀어 넣고 궁둥이를 한 손으로 받친 후에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습니다.


 고양이는 의외로 반항이 없었고 그대로 슉 들어 올려지더군요. 아이고 가벼워라.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소리는 뭘까요. 고로롱고로롱, 마치 털옷을 손톱으로 부드럽게 긁거나 한적한 곳에서 봄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물 몸에서 이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지요. 그 소리의 정체를 몰랐던 저는, 고양이가 분명히 찬바람을 많이 쐐서 감기에 걸린 나머지 가래가 끓는구나 하고 짐작했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씻기고 잘 말린 후 재워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고양이를 함지박에 넣고 씻기는데, 그렇게까지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기색은 없었고 고롱고롱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려 퍼졌지요. 씻기면서 특히 먼지투성이 발을 잘 문질러 주는데, 발바닥 젤리가 토실토실한 아기의 볼살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감기가 들어서 몸이 좋지 않은데도 이토록 얌전하고, 몸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기 그지없고, 처음 보는 사람과 낯선 장소에서 씻기를 경험하고 있는데도 겁먹지도 않다니. 귀여우면서도 용감한 이 녀석은 제가 알던 고양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젠장 감히 이몸을 씻기다니!!!
어 피곤하다.....




 어영부영 씻기고 나서 발수건 위에 내려놓으니, 고양이는 열심히 뒷발질을 하면서 물을 튀겨냈습니다. 혹여 감기가 더 심해질까 얼른 다른 수건으로 몸 구석구석을 말려 주었는데, 아무래도 수건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차라리 침대 위에 올려 두고 이불로 동굴 비슷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지요. 겨울이 되지는 않았지만 난방도 좀 틀어야겠고요. 축축하게 젖어서 마치 세탁기에서 갓 꺼낸 털옷처럼 변해 버린 녀석을 침대 위에 올렸습니다.


 어라, 이 녀석 혼자서 온몸을 핥습니다. 누가 알려준 것인지 몸을 이리저리 꼬아 가면서 배도, 앞발도, 뒷발도 핥으면서 스스로 몸을 말리려고 열심입니다. 조금 지나자 몸이 말라가면서 마치 고슴도치처럼 털이 뭉치는데 이런 모습 역시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직도 그녀는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고양이를 구경하느라 저도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더랬지요. 아까 참치를 잔뜩 먹고 오랜만에 개운해져서 그런지 꼼꼼하게, 온 힘을 다해 털을 관리하는 이 녀석이 어찌나 흥미로웠는지 모릅니다. 한참을 그러고 나니 털도 대강 마르고, 시간은 벌써 12시가 넘었습니다. 이제는 졸린가 봅니다. 핥는 속도가 점차 줄어들고 눈을 꿈벅거립니다. 갑자기 고양이가 몸을 낮추고 앞발을 몸 아래 감추더니, 고개를 살짝 떨구고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아하, 이것이 말로만 듣던 식빵 자세로군요. 꼬리만 조금씩 파닥거리면서, 그 상태 그대로 잠에 들려고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이러면 안 됩니다. 술 많이 먹은 친구도 아니고 처음 보는 고양이를 침대에서 재울 수는 없지요.


 이 말도 안 되게 몰염치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휴대폰을 꺼내 들고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마침 그녀에게서도 답장이 왔군요. 정신없는 일이 좀 지나간 후에 연락이 닿아서 다행입니다. 메시지로 사진들을 보내고, 전화를 해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의를 했습니다. 우선 내일 오전 수업을 듣고 제가 동물병원에 가는 시간에 맞춰 동네로 오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아무래도 저 혼자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거든요. 옆에 누군가라도 있어야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지요. 고양이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요.


 20분이 넘는 긴 통화를 끝내자 고양이는 이미 옆으로 길게 누워서 새근새근 잠에 빠졌습니다. 저는 부리나케 작은 상자 하나를 찾아, 고양이를 다시 안아 들고 뒷발부터 상자 안에 넣어 주었지요. 오늘은 거기에서 자라고요. 잘 자다가 깨어나서 좀 멍해 보였지만 제 손이 닿자마자 고롱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답니다. 도대체 이 소리가 무엇일까 해서 그제야 검색을 해 보니, 맙소사. 기분이 아주 좋을 때 내는 특별한 소리라더군요. 어딘가 아픈 것이 아니라니 다행이었지만, 코가 제대로 꿰인 것 같다는 불길함도 엄습했답니다. 그래도 한시름 놓았으니, 저는 얼른 저대로 녀석을 재우기 위해 훈련병 시절보다 더 빨리 씻고 화장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그새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가 있었답니다. 이제는 아예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제발 내려가라고, 여기는 안 된다고 말을 걸어도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가 편한데 왜 그러냐는 듯이 눈을 슬쩍 떴다가 감는 것이 전부였지요. 상자 안으로 돌려보내도 어차피 침대 위로 올라올 것이 뻔하니, 어쩔 수 없이 고양이가 누운 자리를 피해 조심조심 침대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 작은 것이 제 몸에 깔리기라도 할세라 살금살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으니, 고양이가 제 무릎 정도에 누워 있게 되더군요. 내일 무슨 일이 또 벌어질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자고 정신을 가다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마무리된 줄 알았던 그때, 고양이는 제게 더없이 커다란 시험을 또 안겨 주었답니다. 니이잉 하고 작은 소리로 울면서, 고롱고롱 소리도 내면서 제 품으로 파고든 것이지요. 이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팔 안쪽으로 들어와 칭얼거리는데, 엄마를 찾는 아기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답니다. 아아, 이 사랑스러운 것! 저는 이 시점에서 결국 완전히 굴복을 해 버렸습니다. 바야흐로 집사가 될 운명을 받아들인 순간이었답니다. 팔에 안긴 따뜻한 털뭉치,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나는 털뭉치,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보면 말랑말랑한 살 밑으로 섬세한 뼈와 근육들이 만져지는 털뭉치. 제가 장담하건대, 그렇게 편안하면서도 긴장되는 밤은 그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고 없을 것이랍니다. 세상 편안한 얼굴로 바로 깊은 잠에 빠진 고양이와 다르게 저는 거의 밤을 꼴딱 새운 후에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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