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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레 Jun 09. 2023

그렇게 집사가 된다 - 3

집사는 처음이지만 괜찮을지도


 대체 언제 잠들었을까요.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중천이었습니다. 꿈이라도 꾼 것 같았지요. 고양이가 저를 따라오는 기분 좋은 꿈 말입니다. 그러나 한쪽 팔이 묵직한 것을 느끼고, 손가락을 슬쩍 움직이자 무엇이 꿈틀 움직이더니 이불 밖으로 하얗고 조그만 발 두 개가 모습을 보였답니다. 이불을 들춰 보니 고양이가 기지개를 쭉 켜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더랬지요. 꿈이 아니었군요. 아주 말랑말랑한 현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천하태평, 천하를 거머쥔 후 처음으로 푹 자고 일어난 패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저는 제 볼을 꼬집어 보았습니다. 아픈 것을 보니 역시나 현실이었지요. 새벽에 잠이 들어 너무 늦게 일어난 나머지 곧 동물병원이 점심시간이었는지라, 일단 좀 더 정신을 차리고 단단히 준비를 한 후에 이 녀석과 집을 나서기로 했습니다.


첫날부터 적응 완료.


 일단 화장실을 좀 가려고 했는데, 팔을 빼자 뻗고 있었던 앞발로 얼굴을 가리면서 꾸루룩 하는 소리를 내더군요. 눈부시니 이불 좀 덮어 달라는 뜻인지 다시 몸을 웅크렸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문득 기억이 났는데, 전날 밤에 찾아보니 고양이는 보통 모래 위에 일을 본다고 하더군요. 집에 그런 것이 있을 리는 없고, 변기에 데려가서 앉혀 놓고 여기다 해결하라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하겠지요. 그래도 녀석은 워낙 먹은 것 없이 며칠을 지내서 그런지 전날 포식을 했어도 별로 속이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벌써부터 이렇게 온갖 걱정을 다 하게 만드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할지! 그것조차 걱정이었지만 우선 할 수 있는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답니다.


 큰일을 앞두고 있으니 목욕재계도 하고, 고양이를 넣어서 다닐 만한 커다란 가방도 찾아봐야겠지요. 부리나케 씻고 나와서 보니 고양이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앞다리를 뻗고 게으르게 늘어져 있는데, 불안요소가 단 하나도 없다는 듯 배를 보여준 채였지요. 이제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답니다. 머리를 말리면서 집 구석을 뒤져 보니 먼지가 살짝 앉아 있긴 했지만 옷을 보관하는 상자가 눈에 띄더군요. 투명한 부분 덕에 고양이가 밖을 내다볼 수도 있을 것이고, 금속 지지대로 모양을 고정시키면 그럴싸한 이동 수단이 될 것 같았답니다. 담요도 하나 깔아 주니 나름대로 훌륭했지요.




 고양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저를 관심 있게 쳐다보길래 저도 침대 옆 바닥에 앉아서 고양이를 봐주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코를 갖다 대니 다시 고롱고롱, 부비적. 이번에는 코를 핥아 주기까지 했답니다. 혀에 있는 가시 때문에 코의 피지가 다 빠져나올 기세였지만 마음에는 감동이 가득 차올랐지요. 그러다가 잠이 깼는지 일어나서 총총총 침대 밑으로 내려왔는데,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냐앙 하면서 이번엔 제 다리 위로 올라오더군요. 확실히 제가 알고 있던 고양이와는 다른 녀석입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다니요.


 어, 그런데 이것은 무슨 행동일까요. 갑자기 영차영차 몸을 동그랗게 말더니 자기 꼬리를 물고 고롱고롱 소리와 함께 핥기 시작합니다. 핥는 것인지 빠는 것인지 몰라도 아무튼 아주 열심히도 했지요. 대체 무엇인지를 모르니 멍하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발로 제 다리를 쭉쭉 밀어내기까지 해서 발톱이 자꾸 살을 찔렀기 때문에, 손가락을 앞발과 다리 사이에 밀어 넣어야 했지요. 한참을 그러다가 입맛을 짭짭 다시면서 꼬리를 놓고 앞발을 정성스럽게 핥는데 그때까지도 저는 무슨 상황인지를 몰라서 다리가 저린 것도 잊고 계속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일단 기분은 상당히 좋아 보이니 이따 병원에 가서 제대로 상담을 받아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고양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쓰이는 저와 다르게, 이 녀석은 침대 밑도 들어가 보고, 냉장고 위에도 올라가 보고, 어젯밤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탐험하면서 신나게 자기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참 고양이가 바빠 보여서 미리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저도 나갈 준비를 마쳐 놓았지요. 마침 병원 점심시간도 끝나 가고, 그녀에게도 연락을 받아 둔 상태. 상자에 녀석을 넣고 출발만 하면 되었지요. 지퍼를 잠그는 동안 뛰쳐나와서 침대 밑에 숨어 버리면 어찌하나 싶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안아 올리는 그대로 상자에 얌전히 들어가더군요. 이토록 착한 녀석이 밖에서 그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답니다. 병원에 가서 꼭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두 손, 아니 두 팔로 상자를 받쳐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고양이는 야옹야옹 울음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상자 안에 잘 있었답니다. 좀 흔들리기도 했고, 괜히 자기를 버리려고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해서 불안할까 봐 들리지도 않을 말을 계속 걸었습니다. 병원 가자, 얼른 갔다 와서 또 놀자,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화장실도 잘 가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잠도 자자 등등. 투명한 부분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이런저런 말을 거는데, 오히려 제가 더 불안해서 난리였지요. 병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긴 했지만 긴장한 상태로 움직이려니 바람이 꽤 찬데도 추운 줄 모르고 땀이 줄줄 흐르더군요. 여차저차해서 병원에 당도했는데, 맞아 주시는 병원 관계자분께서 흠칫하신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머리는 바람에 날려 산발에, 옷도 대충 아무거나 걸쳐 입고, 두 팔은 엉거주춤 앞으로 내밀고 이상한 상자를 받쳐 든 웬 거지꼴 남자가 헉헉거리며 들어왔으니까요. 사정을 설명하자 수의사 선생님께서 가방을 열고 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퍼를 열자 지금껏 무섭긴 했는지 고양이가 냅다 튀어나오는데, 역시 전문가는 다르더군요. 수의사 선생님께서는 고양이를 한 번에 잡아 그 자리에 고정을 시키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말이지요. 보자마자 꼬리가 젖어 있다고 살짝 놀라셨는데, 좀 전에 제 다리 위에서 자기 꼬리를 빨았다고 말씀을 드리니 엄마를 찾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라고, 저를 아예 엄마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엄청나게 감동을 했더랬지요.


 다행히 아픈 곳은 없었는데, 이미 중성화가 완료된 상태라 어디서 고양이를 데리고 왔는지 물으셨습니다. 주택가에서 데려왔다고 하니, 덩치를 보면 5개월 정도는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탈출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이미 저를 보호자로 확실히 인식하고 있으니 함께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계획이 있냐고도 물어보셨답니다. 본의 아니게 녀석에게 홀렸으니 계속 함께해야 하겠다고 답하자 선생님께서는 간택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며 고양이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이것저것 알려주셨습니다. 모래, 사료, 장난감 등등… 가격도 만만치 않더군요. 게다가 예방접종과 심장사상충약 처방까지 해야 했으니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저는 어질어질할 따름이었지요. 두통이 밀려오더라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필수적인 것들이었으니까요. 마침 수업을 끝낸 그녀가 병원으로 들어왔군요. 계산한 물품들을 낑낑거리며 나눠 들고, 고양이를 상자에 욱여넣고, 다시 자취방으로 고된 걸음을 옮겼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저는 자취방에 돌아올 때까지 으어, 죽겠다 같은 소리만 반복했지요. 자취방에 돌아오자마자 어제 씻길 때 썼던 함지박을 마른 수건으로 닦은 다음 임시로 모래를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병원 마실로 약간 겁에 질린 고양이에게는 간식을 대접했지요. 물론 실제 고생은 사람 둘이 했지만 어쨌든 놀라운 속도로 간식을 먹어치우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답니다. 동공이 좀 커진 채로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말라깽이 고양이를 보고 나서야 한시름 놓은 둘은 각각 그 자리에 누워 늘어졌습니다.


조금 겁에 질렸지만 아무튼 모디의 리즈 시절.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직도 저는 이 녀석을 고 선생, 얘야, 야옹아 이렇게 부르고 있더군요. 이름을 정해야겠지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여러 후보가 있었지만 결국 고양이의 이름은 모디가 되었습니다. 이제 같이 평생을 살아야 할 텐데, 조금 막막하긴 했지만서도 결론적으로는 기쁘기 그지없었습니다. 보송보송 털복숭이와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어서 기뻤고, 제가 모디를 책임질 만한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으며, 함께 모디를 보고 이 행복을 나눌 사람이 옆에 있어서 기뻤지요. 저 당시에는 아직 동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저의 사랑을, 이따금씩은 그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모디는 무럭무럭 자라났답니다. 아주 무럭무럭 말이지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모디가 정말 얌전하고 상냥한 고양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지금의 모디는 어떨까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 모습들은 전부 연기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멍청한 인간을 부려먹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모디는 한 달 정도가 지나자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조금씩 말을 듣지 않고 난리를 치더니, 이미 저 당시에도 상당히 덩치가 컸던 모디는 사료와 간식을 탐욕스럽게 먹어 훨씬 더 거대해졌고, 얼마 가지 않아 넘치는 힘과 체력으로 집사에게 폭력을 행사했지요. 결국 과도한 사랑을 받고 응석꾸러기이자 성질 더러운 고양이가 되어 버렸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디가 아니라, 훨씬 잘 맞는 이름을 지어 줄 것을 그랬습니다. 더 촌스럽고 팍팍한 이름으로요.


 예방접종을 받으러 갈 때마다 늘 굉장히 크다는 말을 듣고, 모든 주변 사람들이 모디의 성질머리에 놀라며, 저와 동거인도 매일 이 아저씨 고양이의 행동거지에 한숨을 푹푹 내쉬곤 합니다. 비록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삶은 언제나 시련의 연속인 만큼 앞으로도 성심을 다해 돌볼 예정입니다. 제가 낳지는 않았어도 저를 선택했으니 자식이나 다름없고 부모는 자식에게 헌신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수록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더욱 사랑스러워지니, 말은 이렇게 해도 저와 동거인은 첫 단추를 참으로 잘 꿰었다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아무튼, 그렇게 저는 집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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