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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레 Jun 07. 2023

그렇게 집사가 된다 - 1

너, 내 집사가 되어라


 삼대가 덕을 쌓아야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들 합니다. 고양이에게 간택을 받는 일도 그만큼 행운이 따라야 하는 일 중 하나인 듯합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생활방식과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생물에게서 신뢰와 사랑을 받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이니까요. 더구나 고양이는 경계심도 아주 많은 편이고, 딱히 사람과 엮이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지요.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간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오로지 마음만 준비되어 있었던 상황에 급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살면서 만난 대부분의 동물들이 저를 아주 친근하게 대해 주어서 그런지 오히려 사람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언젠가 꼭 집사가 되리라는 다짐을 했던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놀랄 대로 놀란 저는 여러모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고, 그 이후로 제가 꽤 운이 좋은 사람임을 자각할 수 있었지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고양이와 친해질 수 없는 분도 있으실 테고, 친해지더라도 간택을 당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분도 있으실 테니까요. 고양이와 함께 살 수 있으려면 여러 가지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매번 만족할 줄 모르고 욕심을 부리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더군요.




 2017년 당시 저는 학원 강사 일을 병행하면서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일하는 학원이 집에서 멀리 있었고, 학생들이 방과 후에 학원을 오니 귀가 시간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일을 마치고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을 걷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길눈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어두워서 매번 같은 길로만 다닌답니다. 그날도 매일 지나던 골목에 들어섰는데,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던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끔 고양이들이 서로 싸울 때 거칠게 우는 소리는 들렸지만, 그날처럼 한 마리가 우는 것을 가까이서 제대로 들은 적은 처음이었지요.


 고양이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근처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배가 고프고 힘들어서 울고 있다는 직감이 세게 다가왔지요. 숨을 죽이고 근처를 조심스럽게 탐색해 보아도 미야앙미야앙 우는 소리는 점점 커지는데 여전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근처 편의점에서 참치 캔(무엇을 먹여야 할지도 몰라서 고양이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막연한 생각 아래 사람이 먹는 참치를 샀답니다)과 일회용 접시, 생수를 부리나케 사서 아까 그곳으로 돌아갔지요. 사실 무책임한 행동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왜인지 모르게 그래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아마 운명이라서 그랬는가 봅니다.


 그런데 막상 가니 고양이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더군요. 시간도 좀 있겠다, 어떤 고양이든 배불리 먹는 모습이나 보자 하고 참치 캔과 생수를 뜯어 접시에 부어 두고 기다렸습니다. 만약 고양이가 안 나타나면 제가 집에서 라면에 넣어 야식으로 먹을 생각으로요. 그때 웬걸, 저 멀리서 작은 미야앙 소리가 다시 들렸고 저는 접시들을 들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30초 정도 걸었을까요,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자동차 옆에서 불쑥 나타나더군요. 그 말라깽이 치즈태비 고양이는 저랑 마주치자 좀 놀랐는지 앞발 한쪽을 든 채로 굳어 있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에 커다란 귀가 쫑긋거리는 모습이 잘 보였지요.




 저는 접시 두 개를 바로 옆에 내려놓고 멀찌감치 물러나서, 고양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살짝 눈치를 보던 고양이는 궁둥이를 대고 바닥에 앉더니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어요. 지금 가도 되나, 이게 맞는 일인가 하고 고민하는 모습이었지만 결국 배고픔이 경계심을 이겼나 봅니다. 5초도 걸리지 않은 고민 후에 쫑쫑쫑 다급히 달려오더니 참치를 먹기 시작하는데,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니 며칠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털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길고양이들과 다르게 털이 매끈하고 결이 잘 다듬어져 있어서 아무래도 사람 손을 좀 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주변 집 중 마당이 있는 곳에서 자라다가 탈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 아무리 배고프다 해도 그렇지 너무 허겁지겁 먹어치웁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잘 먹습니다. 접시 전체에 부스러기를 튀겨 가면서 순식간에 와구와구 다 먹고, 아쉬운지 접시 주변을 돌면서 흘린 것들까지 다 싹싹 핥아먹고는 물도 정신없이 마셔 댑니다. 촵촵촵 소리를 내면서 물을 반이나 비워 내고는 짭짭 입맛도 다십니다. 다행히 더 달라는 눈치는 아니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앞발로 얼굴을 비벼 가며 만족스럽게 얼굴 청소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졌답니다. 그렇게 맛있었냐고 물어도 반응도 없고, 고맙다는 표시도 없이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는 이 녀석의 행태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익히 들었던 고양이의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실제로 보니 재미있기도 했고요.


 식후 관리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것 같아서 저는 남은 물을 버리고 접시들을 챙긴 뒤 자취방에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조용히 뒷걸음질로 물러나는데 고양이가 한참 얼굴에 부비적대던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저를 다시 물끄러미 보더군요. 그래서 손을 흔들며 잘 살라고, 인연이 되면 또 보자고 인사를 해 준 다음 돌아서려는 찰나, 결코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양이가 제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었지요. 그때 정신이 멍해진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인생 처음으로 알게 되었답니다. 수능을 볼 때도, 군대에서 화생방 체험을 할 때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정말 뇌세포가 전부 마비되는 느낌이었지요.


잘도 먹네 요 녀석!!!




 설마 저러다가 돌아서서 가겠지 하고 뒤를 흘끔거리며 천천히 걸어가는데, 고양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대놓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전봇대 뒤에 숨어서 살짝 고개를 내밀어 보고, 구태여 몸을 잔뜩 낮추고 자동차 아래를 조심조심 통과하고, 주차금지 팻말 쇠기둥에 자기 몸이 가려질 거라 생각했는지 그 뒤에서 저를 지켜보며 따라왔답니다. 숨막히는 추격전이었지요.


 얼마쯤 지나서 신호등이 없는 작은 횡단보도가 나오자 잠깐 멈칫하다가도, 자동차가 안 오는 틈에 건널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아는지 한 대가 지나가고 나자 가볍게 통과하더군요. 자취방까지 50m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 저는 당황한 나머지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길을 꺾어 어떤 집 대문 밑에 몸을 숨겼습니다. 혹시나 제가 안 보이면 못 찾고 알아서 돌아가지 않을까 해서요. 그러나 솔솔 풍기는 예비 집사의 냄새를 결코 놓칠 수 없었는지, 고양이는 어느새 골목 안으로 들어와서는 제 쪽을 보고 야옹 울었더랍니다. 자기를 데려가 달라는 거대한 욕망의 울음소리! 그 소리에 매료된 제 머릿속에는, 오늘 하루만 데리고 자고 내일 대책을 강구해 보자는 생각이 스쳐갔지요. 맹세하건대, 제가 스스로 해낸 생각이 아니라 어디선가 들어온 생각이었습니다. 아마도 간악한 고양이가 강하게 주입을 했겠지요. 저는 별 수 없이 고양이가 시야에 들어오는 정도로만 떨어져서 뒷걸음질치다시피 자취방으로 향했고, 고양이는 더 이상 숨어서 염탐을 할 필요성도 못 느꼈는지 그냥 따라왔습니다. 자취방 앞에 있는 철문에 당도하자,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을 열면 들어갈까? 네, 그렇습니다. 철문을 폴짝 뛰어넘어 착지했습니다. 이제 자취방 현관문 앞에 도달했습니다. 설마 이 문을 열어도 아까처럼 무턱대고 발을 들이밀까? 네, 물론이지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양이는 방 안으로 당당히 입성했습니다.




  여기까지 일이 커지자, 뒤늦게 이성이 다시 발동하더군요. 반려동물 경험이 없던 저는 도저히 이 녀석을 함께 데리고 살 자신이 없었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단 하루일지라도 불편해할까 봐 염려도 되었지요. 도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저는, 조심스럽게 녀석을 안아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가, 철문을 넘어 녀석을 내려놓았습니다. 안아도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들려 나갔는데, 내려놓자마자 따라오려고 곧바로 시동을 걸었습니다. 놀랄까 봐 뛰지는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발을 끌듯이 움직인 저는 고양이의 에우웅 하는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재빨리 철문을 닫았지요. 아아, 그러나 그때는 쌀쌀한 가을밤! 따뜻하고 포근한 곳에서 자고 싶었을 저 가엾고 애처로운 녀석이 눈에 자꾸 밟혔더랬습니다. 당연히 고양이가 또 농간을 부려서겠지만 어쨌든 이성은 연거푸 패배했고, 저는 철문을 다시 열었고, 눈앞에는 어느새 고양이가 다시 와 있었답니다.


 하루만이라도 잘 재우자는 다짐을 하고, 함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고양이는 의기양양, 남의 집에 들어갈 때 약간이라도 차려야 할 예의는 전혀 없이 제 집인 양 즐겁게 들어갑니다. 사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 히히히 신난다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자세히 보니, 밖에서는 몰랐는데 배 쪽이 좀 꾀죄죄하고 발도 더럽군요. 먼저 씻겨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우선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에 도움을 좀 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의 제 동거인, 인생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이 일을 자랑도 하고 해결책도 함께 모색해 봐야겠지요. 다음으로는 어머니, 이렇게 당혹스러운 일에는 어머니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한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겠지요. 마지막으로는 친구들, 반려동물 경험은 다들 없었지만 혹시나 인터넷에서 주워 모은 지식이 있을 수도 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겠지요. 가방도 벗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미 온 집을 들쑤시고 있는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먼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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