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지
사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천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돌에도, 나무에도, 흙에도, 심지어 공기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지요. 또한 통상 작품에 치명적이라고 알려진 습기, 곰팡이가 만들어낸 효과가 작품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답니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재료가 물감과 캔버스 천이며, 그 둘이 그림의 시작과 끝을 대부분 좌우한다면 역시 각각의 성질과 사용 방법을 조금은 알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캔버스 천은 그 근본이 생물의 부산물이라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최대한의 성능을 가진 천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천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드는 일도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천은 면과 마 등의 재료를 쓰고 거기에 화학처리를 해서 공급되는데, 일반적으로는 그 상태로 그냥 쓰지만 화학처리가 되지 않은 생천을 쓰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먼저 화학처리가 된 천의 경우에는 공정 과정에서 이미 흰색의 물질이 직물 위에 도포되어, 물이나 기름에 씻겨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잘 흡착되어 나옵니다. 이 물질은 ‘젯소’라고 부르는데 걸쭉하고 끈적하며 살짝 신 냄새가 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페인트가 잘 칠해지도록 먼저 발라 놓는 보조제로 많이 사용되는데, 적당량의 물에 섞어 농도를 조절하지요. 수성과 유성 재료 둘 모두와 잘 어울리고요.
젯소가 도포되면 천의 씨실과 날실이 만드는 거친 느낌이 줄어들고 생천에 물감을 올릴 때보다 훨씬 편합니다. 아무래도 천이 물감을 직접 빨아들이는 현상을 젯소가 막아 주는데다가 올들 사이로 물감이 빠지거나 붓이 걸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젯소는 물감의 흡착력을 높여 주는 효과도 가져옵니다. 극단적인 흰색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발색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요. 보통은 그렇게 화학처리된 천 위에 젯소를 몇 번 더 칠해서, 물감이 자신의 성질을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합니다. 심지어는 건조된 젯소 위에 물을 뿌려 표면만 살짝 녹인 후 사포로 갈아 완벽하게 매끄러운 화면을 만들 수도 있답니다. 고운 사포로 갈면 이것이 정녕 한때 캔버스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지요. 매끈해진 캔버스 위에 독일제, 혹은 일본제 등 입자가 고운 물감을 사용하면 금상첨화입니다.
젯소는 거의 사서 사용하지만 작업 방식에 따라 바르지 않을 수도 있고 직접 만들어 쓸 수도 있습니다. 저는 물감이 미처 다 마르기 전에 두껍게 여러 번 바르고 오랜 시간에 걸쳐 건조시키는 편입니다. 그 과정에서 물감이 두께를 잃어버리거나, 아래로 미끄러지거나, 이전에 발라 뒀던 색이 완전히 존재감을 잃어서는 안 되지요. 즉 물감이 적당하고 적절하게 천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답니다. 시행착오가 상당히 많았지만 결국 저는 젯소보다는 같은 물감을 통해 흡착력과 질감을 얻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 작업은 상당히 거칠게 이루어지는데, 물감끼리 들러붙고 건조되는 과정에서 덜 마른 물감이 울퉁불퉁 들고 일어나는 질감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젯소를 바르면 물감을 바를 때의 힘과 물감의 부피를 못 이기고 젯소가 같이 밀려나면서 물감과 뒤섞이거나 흉하게 벗겨지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아쉽게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화면이 너무 평평해지는 것도 문제이고요.
반면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는 물감을 겹겹이 얇게 쌓아 독특한 깊이를 만드셨습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젯소로는 그 느낌을 만들 수 없어서 일일이 만들어 쓰셔야 했지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가 아교와 흰색 물감을 혼합하는 것인데, 아교의 접착력과 흰색이 잘 버무려지면 꽤나 성능이 좋은 젯소가 됩니다. 플레이크 화이트라고 불리는, 제가 자주 쓰는 무거운 흰색이나 크렘니츠 화이트처럼 납 함량이 굉장히 높은 흰색보다는 타이태니움 화이트처럼 무난한 흰색을 써 주는 것이 혼합하기에도, 건강에도 좋겠습니다. 흰색 물감도 종류가 많으니 물감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 자세히 쓰도록 하지요. 마지막으로 젯소가 도포되지 않은 생천 위에 바로 작업을 할 때에는 아교만이라도 발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물감을 묻히면 거의 마댓자루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효율성이 많이 떨어지거든요. 올이 아주 촘촘히 짜여 있지 않고서는 물감과 기름이 천 뒤로 새어 나와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고요. 아교를 사용하려면 중탕이 필요하기에 번거롭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면 해야겠지요.
젯소까지 다 바르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런데 물감을 어떤 상태로 올리는지도 중요한 문제랍니다. 동양에서 주로 쓰이는 종이나 비단은 재료 자체가 은은한 색감을 내기 때문에 여백의 미를 자연스럽게 낼 수 있었지요. 그래서 먹 혹은 색채의 농담을 조절하면 그 맛을 더욱 살릴 수 있기에 그런 방법론이 크게 발달했어요. 일본화는 강렬한 채색법을 자주 사용하기에 그런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기는 합니다만, 수성 재료가 주된 매체였던 동양에서 종이와 비단이 가진 특성은 사상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매우 적합했지요.
반면 서양에서는 흔히 패널이라 불리는 나무판이나 캔버스 천, 석회칠된 벽을 주로 사용해 왔고 화면을 꼼꼼히 채워 내는 경우가 많기에 물감을 전체적으로 칠하는 기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벨라스케스와 같이 여백의 미를 훌륭하게 냈던 화가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물감이 만들어낸 여백이고, 천의 느낌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방식은 서양화에서 생각보다 늦게 시도되었어요. 아무튼 저 매체들은 물감과는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서양화에서는 천 전체에 얇게 회색조 혹은 황갈색조의 물감을 미리 칠해 전체적인 균형을 잡았습니다. 그래야 아무것도 없거나 뻥 뚫린 부분에도 균일한 색조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이 과정을 통칭 ‘밑색을 깐다’ 라고 하는데, 밑색을 깔지 않고 그리면 아주 조심스럽게 색을 쓰지 않는 한 ‘색이 붕 떠’ 버릴 때가 왕왕 있답니다. 웬만큼 감각이 좋지 않고서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경우가 아니면 밑색을 까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 됩니다.
색을 칠하는 것과 더불어 질감을 미리 내기 위한 과정도 있습니다. 입자가 큰 재료를 섞어 회칠 비슷한 과정을 거치거나, 다른 매체를 붙였다 떼거나, 물감을 잘 흡수하는 재료를 바르기도 하지요. 저는 물감을 미리 두 번 이상 두껍게 칠한 다음 붓으로 밀어 질감을 내 놓고, 그 물감이 속까지 완전히 건조되기 전에 그림을 그립니다. 밑색은 전부 같은 색이니 어떤 색을 칠하든 조금씩 섞이면서 균형잡힌 색조를 유지할 수 있고, 더불어 색과 깊이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거든요. 붓으로 밀린 자국들은 물감이 각자 다른 모양새로 보이도록 해 주기도 합니다. 아무튼 자기 작업 방향을 잘 생각하고 이것저것 시도해 본 다음, 맞는 재료와 방법을 찾아 처리를 해 두면 됩니다.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맞는 방법을 찾는 데에만 몇 년씩 걸리는 사람도 있지요. 지난한 과정이지만 이것 역시 필요하다면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제 겨우 물감이든 무엇이든 사용해서 작업을 시작해 볼 수 있겠군요. 화가 하면 떠오르는 모습과 실제의 작업 과정은 상당히 다름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나마 저는 성격이 꽤 급해서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고심한 편입니다. 저와는 반대로, 보기에는 극도로 비효율적이더라도 수행한다는 마음을 먹고 자기 손에 익은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진득하게 진행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림에는 사람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니 어느 쪽도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그림을 그린다는 일은 자신만이 정해 둔 방향성에 맞지 않는 모든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것,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최대한 간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서툴더라도 끊임없이 작업을 하면서, 자기 앞에 놓인 막들을 한 겹씩 걷어내는 일이지요.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는 불가능하지만 거기에 아주 조금씩 다가가면서요. 결과만 놓고 보면 저런 과정이 전혀 와닿지 않음에도 화가들이 매일 작업을 하는 이유는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애증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살다 보면 싫더라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듯이,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또 하나의 삶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