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기도 하구나 정말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 볼까요. 더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제가 물감을 사용하니 물감에 대해서, 그 중에서도 서양 물감에 대해서만 말을 해보겠습니다. 화방에 들어서면 수많은 제조사들로부터 나온 수많은 물감들이 손님을 반깁니다. 아니, 환영을 빙자한 악마의 유혹이라고 하겠습니다. 물감들은 각자 특징이 있고 성질도 전부 다르며, 고유한 색의 느낌을 가지고 있기에 죄다 써 보고 싶도록 만드니까요. 물론 고가의 물감들이 더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건조된 후 잘 갈라지지 않고, 광택이나 질감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으며 변색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물감들을 써야 그림의 보존이 더 쉬워지고 사용할 때 기분도 좋기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몽땅 쓸어 담고 싶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그럴 수 있는 화가는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감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 우선 색감이나 성질을 파악해서 최대한 맞는 종류를 찾아낸 후에는 자기 지갑 사정에 맞춰 구매하는 것이 현명하겠습니다.
옛날에야 전부 광물이나 숯 등 자연 재료들을 곱게 갈아 안료를 만들고 용매제와 섞어 물감을 사용했기에 옆에서 그 과정을 일일이 돕는 도제들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튜브를 짜기만 하면 물감이 쭉 나오니 참으로 편한 세상입니다. 또한 섬세한 화학적 처리로 더 간편하게 좋은 색들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예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도 실감이 납니다. 재료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나 자금도 훨씬 줄어들었다는 사실도요.
한 예로 울트라마린 블루라 불리는 색은 원래 청금석, 즉 라피스 라줄리를 갈아 만들었습니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인조인간 17호와 18호 각각의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라피스 라줄리는,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물품에 장식을 하는 데에 쓰일 정도로 귀한 보석이었고 그만큼 미칠 듯이 높은 가격을 자랑했지요. 지금도 상대적으로 가격이 좀 나가는 편이고요. 그러나 특유의 새파란, 정말이지 새파란 그 색은 화가들과 작품 의뢰인들의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가격과 구매욕 사이에서 타협을 보고 겨우 건진 결과는, 얼마큼의 청금석을 사용할 예정인지 일일이 계약서에 명시해서 그림 가격에 붙는 추가 금액을 결정하는 것이었지요. 그마저도 성모 마리아의 옷자락 등 중요한 부분에 조금씩만 사용할 수밖에 없는 등 애로사항이 아주 많았답니다. 그나마 교황청이나 궁정 혹은 부유한 귀족들의 의뢰를 받아서 그린다면 그들 밑에 재정 전문가가 있기도 했고, 화가는 계약서에 따라 작업을 해야 했으니 턱없이 욕심을 부리거나 사기를 치지만 않는다면 손해 없이 적당한 선을 지킬 수 있었지요. 그러나 개인 단위로 울트라마린 블루 안료를 구매하자면 문제가 컸습니다.
예술을 위한 집념과 악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울트라마린 블루를 집착적으로 쓰다가 파산하기에 이르렀다는 사람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린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입니다. 꼭 그 이유만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요. 아무튼 울트라마린 블루는 광물 기반 안료라 색이 변하지 않아서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영롱한 빛을 발한다고들 하지요. 예술성 자체도 국보라 할 만큼 뛰어나기도 하고요. 작업을 하는 데에 돈이 많이 들었던 만큼 작품 수가 적어 희소가치 또한 엄청나게 높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과가 궁핍과 요절이라면, 과연 예술과 행복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자기가 현재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재료를 사용해서 최대한의 성능을 이끌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물감이 아무리 좋다 한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매일 쩔쩔매면서 불행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습니다. 그림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요.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은 말할 수 없이 위대하지만 그를 인간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부분 때문입니다. 저가의 바이올린이라도 파가니니가 연주하면 음악이 되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넬리라도 제가 연주하면 소음이 되겠지요. 저 역시 화가이기 이전에 인간인 만큼, 현실과 자신의 역량을 늘 생각해야 평생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뿐더러 지치지 않고 즐겁게 계속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유채 물감을 사용합니다. 영국제 물감과 이탈리아제 물감, 국산 물감을 주로 구매하지요. 영국제 W 물감은 색이 아주 부드럽고 화면에 잘 발리지만 강렬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탈리아제 M 물감은 색이 쨍하면서도 강한데, 제 작업의 주된 색감은 그런 쪽이 아니라 어두운 부분을 효율적으로 잡기 위해서만 쓰지요. 국산 S 물감은 특이하지만 단순한 색들, 이를테면 컴포우즈드 블루나 터콰이즈 블루 등을 필요로 할 때 삽니다. 외국 회사들은 그런 색들을 지나치게 튀거나 애매하게 만들어냅니다만, 기본을 잘 지켜서 마치 ‘이것이 바로 이 색이다!’ 라고 외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랍니다. 다만 저는 국산 물감 중 흰색은 절대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 사용하지 않는지는, 국산 흰색 물감을 많이 포함시켜 그림을 그린 후 몇 달 뒤에 다시 꺼내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을 저 몰래 누군가 레몬 주스 안에 담가 놓기라도 한 모양이더군요.
유화 말고도 아크릴화, 템페라화, 프레스코화, 과슈화, 수채화에도 사용되는 물감들이 따로 있고 전부 성질이 다르답니다. 아크릴화와 수채화, 과슈화, 프레스코는 보통 물을 사용합니다. 템페라화는 안료에 달걀 노른자, 무화과 즙, 꿀 등을 용매제로 쓰지요.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아크릴 물감은 유채 물감보다 기계적이고 더 매끄러운 느낌이 들며, 유채 물감이 그 자체로 끈적거린다면 아크릴 물감은 끈적거림 위에 무언가 한 번 더 코팅된 느낌을 준답니다. 일종의 녹은 플라스틱과 같은데, 솜씨 좋은 사람이 쓰면 오히려 유채물감보다 훨씬 깨끗하고 시원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단점은 기본 안료를 아크릴 물감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결합제인 에멀전의 특성상 지나치게 빨리 건조되기 때문에 유화처럼 여유 있게 그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특성상 건조되면서 부피가 줄어드는 속도도 빨라 종이나 천이 안으로 우그러지기도 하고요.
과슈 물감은 아크릴 물감과 비슷하기는 한데 당 성분을 결합제로 쓴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과슈 물감은 마르면 색이 진해지고 빛 반사가 줄어들면서 단단한 느낌을 주지요. 그래서 불투명 수채화에 가깝게 됩니다. 물론 아크릴 물감이나 과슈 물감이나 물을 얼마나 섞는지에 따라 수채물감처럼 쓸 수도 있습니다만, 보통 이들은 번지는 느낌이 강한 그림을 그릴 때 사용되지는 않기 때문에 물은 적당량만 쓰는 것이 좋습니다. 과슈화는 아크릴처럼 인공적인 느낌이 적어서, 유화와 수채화의 중간 정도를 원하는 분들이 많이 사용하지요. 또한 주 작업보다는 드로잉이나 에스키스에서 자주 보이고요. 아크릴 과슈 물감은 둘의 특징을 섞은 형태인데, J물감이 가장 유명합니다.
수채화 하면, 물을 많이 머금고 있는 물감이 종이에 퍼지는 맛이 일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가장 저렴한 편에 속해서 접근성도 좋은데다가 물만 있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고, 과슈나 아크릴과 달리 물감이 굳더라도 물에 녹이면 원래의 상태를 거의 회복하기에 효율성도 높습니다. 그러나 수채화의 단점은, 두말할 필요 없이 어렵다는 것이지요. 물을 많이 타야 하기에 잘못하다가는 종이가 들고 일어나 때처럼 표면이 벗겨지고, 조금이라도 물감끼리 잘못 섞이면 탁해져 투명한 물맛이 없어지게 되니까요. 그래서 수채화에서는 보통 검은색은 파란색과 갈색의 결합 등으로 비슷한 명도를 갖도록 만들어 쓰고, 흰색은 아예 칠하지 않고 여백을 남기는 방법으로 표현하고는 합니다. 같은 수성 재료를 썼던 동양의 방법과 비슷하지요. 게다가 캔버스 위에서는 물맛이 나기 어려워서 본래의 특징을 살리려면 종이에 써야 한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단언하건대, 수채화는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특성을 가진 재료라 하겠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수준에서 말이지요.
한편 수성 재료는 작업 방식에 따라 본래의 특성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는 화가 중 한 분은 수채물감을 소위 ‘물맛’보다는 ‘얇음‘에 중점을 두고 쓰시는데, 그분의 그림에서는 분명 물감에 섞은 물 양은 적은데도 메마른 느낌은 없고 산뜻함만이 있습니다. 얇게 여러 번 칠해져서 은은하게 드러나는 캔버스의 느낌과 오밀조밀 예쁘게 쌓인 붓자국들은 덤이고요. 아크릴이나 과슈도 같은 수성 재료이지만 아무래도 결합제의 차이가 있어서, 그것들로는 내기 어려운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채 물감을 쓰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대로면 글이 너무 길어질 터이니 템페라화, 프레스코화, 제 전공인 유화에 사용되는 물감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많은 재료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나 봅니다. 선사 시대에마저도 숯, 사냥의 부산물, 돌가루 등으로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그 재료들 역시 물감이라 한다면, 물감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는 사실상 같은 시간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