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모르겠어
템페라 물감의 순서이군요. 템페라는 기름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 가장 널리 쓰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바로 템페라로 그려진 그림이랍니다. 사실 예전에는 물감의 안료와 사용 방법 자체를 템페라라고 지칭했습니다만, 재료가 세분화되면서 단어의 의미가 축소된 것이지요.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했듯 템페라는 달걀을 주로 쓰며 아교와 벌꿀, 무화과 즙, 카세인(단백질의 일종)도 꽤 자주 사용되었답니다. 특히 카세인은 우유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래서인지 현대의 여성 화가들이나 인도 화가들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 재료가 되기도 하지요. 독일의 로사 로이(Rosa Roy, 1958~), 인도의 마헤쉬 발리가(Mahesh Baliga, 1982~)와 같은 분들이 카세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신답니다. 유화가 보편화된 현대의 템페라화는 재료 자체에 의미가 있는, 하나의 특수한 장르로서 대접받기에 선택하려거든 굉장히 신중해야 해요.
우선 달걀 노른자는 콜레스테롤 함량이 많아서 안료를 개기에 생각보다 적합합니다. 흰자는 담백한 색을 내기에 좋지만 흰자만 썼다가는 그림이 갈라지고 부스러진다는 약점이 있어서 노른자와 함께 써야만 했습니다. 템페라는 캔버스 천에도 그려졌지만 특히 나무판 등에 그림을 그릴 때 상당히 효율적이었지요. 또한 용매제가 단백질이라 자연 피막이 형성되면서 그림이 외부 자극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화면에 수성 바니시와 기름칠로 마무리를 해 주면 보존성이 배로 높아졌고요.
하지만 지금처럼 냉장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시절, 식초를 들이부어 피클이라도 만드는 것처럼 해 놓지 않고서는 달걀을 마음놓고 쓰기가 껄끄러웠습니다. 물론 구하기는 가장 쉬운데다가, 노른자와 섞은 안료를 잘 말렸다가 기름에 다시 개어 물감을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 냈지만 이중으로 수고를 해야 하니 썩 좋은 일은 아니었지요. 게다가 템페라화를 하기 위해서는 아교에 구운 석고를 혼합해서 만든 특별한 젯소를 얇게 여러 겹 바른 뒤에 사용해야 했답니다. 나무판에 그려진 유화들도 그런 과정을 거쳤으나, 노른자가 섞인 물감을 칠하는 일은 그보다도 훨씬 어려워서 매끄러운 전처리가 중요했거든요. 마지막으로 유화만큼 섬세하고 다양한 표현은 불가능하다시피 했고 상대적으로 빨리 건조된다는 점도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유화가 등장한 이후로 템페라화는 점점 덜 그려지게 되었지요. 정리하자면 웬만큼 숙련된 기술과 재료에 대한 이해도, 적절한 협력 없이는 프레스코만큼이나 시도하기 어려운 방법이었답니다.
프레스코화는 석회를 바른 벽에 그려졌습니다. 일단 벽에 미리 회칠을 하고 완전히 말린 후, 그 위에 다시 회칠을 하고 물감을 바르지요. 프레스코화는 물과 안료를 섞어 그리는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새로 칠한 석회가 ‘마르기 전에’ 물감을 칠해서 석회와 물감이 함께 건조되어야 합니다. 물감이 마르면서 벽의 일부가 되기에 아주 강한 외부 자극을 받거나 벽이 통째로 손상되지 않는 이상 그 모습을 계속 유지할 수 있지요. 반드시 벽이 축축한 상태여야 작업이 가능했다는 점이 프레스코화의 가장 큰 특징이랍니다. 얇게 빨리 칠하면서 입체감과 공간감을 동시에 내야 했기에 템페라화 이상으로 높은 숙련도가 필요했고요. 지금 남아 있는 수많은 프레스코화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진 화가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어 완성해 낸, 그야말로 집념과 재능의 산물입니다.
프레스코화를 그리려면 시간 엄수와 철저한 계획성이 필수입니다. 먼저 작업자는 수도 없이 스케치를 해서 완벽하게 자신이 그릴 부분을 손에 익혀 놓아야 해요. 조금이라도 능숙하지 못하면 실전에서 계획대로 그림을 진행할 수 없으니까요. 그 후에는 벽을 여러 개로 분할하여 커다란 종이에 각 부분에 들어갈 밑그림을 그립니다. 깔끔하게 선 정리가 끝나면 선들을 따라 세심하게 구멍을 뚫는데, 종이를 벽에 임시로 갖다 대고 숭숭 뚫린 구멍마다 석고가루가 담긴 주머니를 툭툭 치거나 목탄 등으로 표시를 해 주지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진 스케치가 벽에 남게 됩니다. 이 과정이 끝나기 무섭게 채색 작업에 들어갑니다. 작업자는 그날 작업할 분량을 정해 두고, 그만큼만 회칠된 벽에 그만큼만 물감을 사용해서 시간 내로 그림을 마쳐야만 합니다. 조수들과 함께 종이를 붙이고, 표시를 하고, 물감을 칠하고, 경과를 확인하고, 정리하고 다음날의 작업을 준비하면 하루가 다 가 버려요. 그렇게 빈틈없이 시간을 투자하는데도 벽화 하나를 그리는 데에 몇 년씩 소요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프레스코화라면 단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시스티나 경당에 그린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벽화라 하겠습니다. 특히 천장화는 최소 10m 이상의 발판 위에서 그려야 하며 가뜩이나 지옥같이 힘든 프레스코화의 과정을, 고개를 쳐들거나 누워서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워낙 성격이 까다롭고 불같아서 조수들이 그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죄다 쫓겨났다거나, 자신만큼 성질이 괴팍하고 임금체불을 일삼는 교황과 자주 갈등을 일으키던 중 발판을 무너뜨려 낙사시키겠다는 협박을 들었다거나, 너무 오랜 시간을 누워서 작업한 나머지 목에 혹이 생기고 등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었다거나 하는 전설은 유명합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회화 실력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작업을 고사했지만, 꼭 그에게 천장화를 맡기려는 교황의 압박과 그 자신의 호승심 및 창작 욕구에 의해 시작하고야 말았습니다. 대체 실력이 어디가 부족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동시에 스스로 배우면서, 고행과도 같은 모든 과정을 거의 혼자서, 몸이 온통 상하고 관절과 뼈가 변형되어 ‘롬바르디아의 고양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들어 가면서 인류문화유산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정신력과 실력은 보통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었지요. 이런 위대한 초인들이야말로 역사를 바꾸고, 역사가 바뀌려는 순간 그들이 운명을 놓고 대결할 만한 이는 오로지 그들 자신뿐인 것 같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대 천재들은 말 그대로 하늘이 역사를 바꾸기 위해 내린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너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요.
분량 조절 실패입니다. 유채 물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제 작업관과 함께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대신, 프레스코화로 그려졌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업자 본인의 신념과 실험 정신으로 인해 훼손된 벽화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마무리를 짓지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프레스코 기법이 요구하는 속도와 불확실성에 진저리가 났던 레오나르도는 벽화에 다른 재료들을 사용해서 좀 더 꼼꼼하고 풍부한 결과물을 내고자 했습니다. 여러 재료를 실험한 후 석고와 젯소를 바른 벽에 템페라화 및 유화 기법을 통해 전무후무한 그림을 완성했지만, 레오나르도는 작품이 매순간 지속적으로 망가지는 참혹한 광경을 목도해야만 했습니다. 곰팡이가 슬고, 표면이 부식되고, 인물들의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요. 템페라가 보존성이 높다고는 하지만 벽화에는 맞지 않는 방식이니까요. <최후의 만찬>은 분명 예술적으로 세계 최고이지만, 재료가 가진 물리적 한계를 고려할 필요도 있다는 교훈 역시도 주는 작품입니다. 다만 레오나르도가 보여준 실험 정신과 놀라운 창의력, 진정성이 망가진 그림에 의해 더 높게 평가된다는 점이 역설적이기는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