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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레 Sep 11. 2023

정당성이 필요해 - 2

그림이 보는 것이어야만 하는 이유


 재료에 따른 정당성은 납득이 될 정도로 갖춰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어떨까요. 현대미술, 그 중에서도 회화(이제부터는 그림 그리기가 아닌 회화로 단어를 바꾸겠습니다) 장르는 시도하기가 아주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기 때문이지요. 가볍게 만 년을 넘어서는 회화의 역사는, 화가에게 물감을 화면에 칠하는 것 이상의 개념과 철학을 요구합니다. 이미 이전 사람들이 근본적인 부분을 다 건드려 놓았으니, 그 틈새를 파고드는 수밖에 없거든요. 더구나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다른 장르들과는 달리, 회화에서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할지언정 접근 방법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평면 위에 재료를 칠한다는 단 하나의 행위가 바로 그것이지요. 여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회화가 아닌, 애매한 무언가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회화는 그 의미든, 행위든 어느 한쪽만을 중시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19세기 말에 인상주의의 등장으로 회화가 ‘읽는’ 장르에서 ‘보는’ 장르로 탈바꿈했고, 다시 20세기 초중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으로 인해 ‘평면 위에 그려진다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심지어 화면은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한 2차원이 아니니 그저 약속된 평면일 뿐이지요. 그래서 ‘본다’, ‘재료를 약속된 평면 위에 사용한다’ 라는 두 가지 전제가 반드시 필요해졌습니다.


 얼핏 들으면 매우 단순하지만 ‘본다’는 개념은 보편성, 즉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읽을 수 있어야’ 하는 상징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품을 본다는 일은 작업한 사람만의 개인적인 부분을 탐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특히 서양에서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성서와 신화 이미지가 사라지거나 재구성되었답니다. 그것들은 이미 ‘읽을 수 있는’ 세계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장 미셸 바스키아도 왕관 이미지를 사용할 때 역사적으로 쭉 통용되어 온 왕관의 의미를 차용하되, 흑인이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투영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했지요. 즉 현대에는 본인만의 이야기가 이미지에 들어가 있지 않다면, 그 작업은 보는 일과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약해지므로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동양에서도 사군자나 문자도, 유교적 가치관을 담은 그림들이 더 이상 주류를 차지할 수 없는 이유 역시 같습니다. 어찌 보면 관객으로 하여금 서양의 그것들보다도 더 대놓고 읽으라 요구하는 작품들이니까요.


 또한 현대에 성행하는 어느 장르에서나 비슷한 변화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회화는 특히나 역사가 길고 보편적인 예술 장르로서 입지를 다진 기간 또한 워낙 길지요. 때문에 그 개인적인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지 없는지가 바로 고전과 현대의 분기점이 된답니다. 한편 개인적인 이야기가 전반적인 공감, 최소한 납득 가능한 수준의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됩니다. 앞선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작업은 타인을 상정하고 하는 일이기에 언제가 되었든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준의 치밀함은 갖추고 있어야 하거든요.




 이 부분이 누구나 가장 어려워하는 지점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그림이 좋아서 회화를 시작한 사람이고, 앞서 말씀드렸듯 그것만으로는 회화를 계속할 수 없어요. 저도 저만의 정당성을 찾아야 했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남들과 딱히 다르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 같지도 않았고, 설령 어떤 지점을 찾아냈다 할지라도 과연 납득이 되는 수준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답니다. 결국 무언가 차별화된 저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수년 간 시달리다가 때려 치우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특별하거나 탁월하거나 아주 새로운 시각과는 거리가 멀고, 거기에 집착할수록 남들을 따라하게 될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세계가 제게 어떻게 보이는지에서 출발점을 다시 잡았습니다. 관객이 제 그림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듯, 저도 세계를 마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저만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도 개인적이지만, 반대로 세상이 저에게만 해주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더없이 개인적이거든요. 세상은 우리에게 결코 대놓고 말하지 않지요. 아주 은근한 방법으로, 이를테면 현상이나 인과, 감정, 흐름 등을 통해 오직 한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저마다 다르게 전달합니다. 우리가 감각을 다섯 가지로 나누는 것과 달리 세상에게 감각의 구분 따위는 없기에, 어떤 방법으로든 그 이야기는 우리 각자에게 도달할 수 있고요. 고양이는 야옹 꾸엑 무야아 울지만 사람은 요 귀여운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사람의 말로 바꾸어 알아낼 수 있듯이 말입니다.


 저야 그림을 그리니 시각적 측면에 집중해야 하고, 대신 보이지 않는 나머지 감각들과 힘을 표현하는 일은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에 맡기는 것입니다. 즉 저는 제게 ’보이는‘ 세계를 그리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물감의 도움을 받아 아우르려고 한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된 평면, 캔버스는 세계를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가령 홀로그램이나 조각은 그 모습이 아무리 비현실적이더라도 결국 제가 사는 이곳에 존재하지요. 영상매체는 빛이 만들어낸 현상이라 달라붙는다는 개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즉 떠 있거나 서 있거나 매달려 있거나 어딘가에 비추어지는 결과물은 저와 어울리지 않아요. 모든 것이 동등하게 뒤섞인 세계, 엉겨붙어 버린 세계는 반드시 ‘그려져야만’ 하니까요.



 이 과정을 제가 하나하나 잘 거친다면, 비로소 타인은 제 그림을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아마 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할 것이에요. 그러려면 우선 저부터 눈앞을 최대한 깨끗하게 만들어, 세계를 읽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맨눈’이 되어야 하고, 그 상태에서 제가 볼 수 있는 것들만을 회화의 소재이자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작업에 동거인과 고양이, 집,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서로 주고받는 힘들, 그 안에서 저만이 받아들이게 되는 이야기들을 그려야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또한 그래야 그림을 보면서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게 되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현대미술의 가치이지요. 그림을 본다는 일은, 그림을 읽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재미난 일입니다.




 대부분의 현대미술작품이 소위 ’예쁘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정확한 재현과 이상적인 비율 사용, 꼼꼼한 시작과 마무리가 드러나는 작업은 사실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읽기 편하니까요. 반면 투박하고 우악스럽고 징그럽고 때로는 너무 대충 만들어져서 화가 나게 만드는 작품들은 금방 읽어내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그 작품들이 현대적 의의가 있다고 하는 것이랍니다. 물론 제가 보아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작업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런 경우에는 작가의 역량이 문제이지 예쁘지 않다고 해서 폄하될 이유는 없지요. 그러니 여러분도 미술관에 가시거들랑 조금은 관대하게 작품들을 보아 주시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작품을 이해하려고 지나치게 애쓰시지도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현대미술작품은 보고 느끼는 것 그 자체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정당성을 위한 또 하나의 부분, ‘계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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