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의 끝
정당성에 필요한 마지막 요소, 바로 ‘계보’입니다.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온 형이 제게 조언을 해준 일이 있습니다. 그때 형은, 현대미술은 ’자신의 좌표를 명확히 아는 일‘이라고 요약해 주었더랬지요. 어디에 제 작업의 뿌리가 있고, 어떤 방식으로 그 뿌리를 변형 및 적용했으며, 결과적으로 나온 이미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어느 부분을 포착하고 있는지에 관해 숙고하는 일이 바로 현대미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미술사를 알고 있어야 하고, 시대별로 속해 있는 화가들과 그들의 특징, 작품성을 파악한 다음 내 작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확실히 해야만 합니다.
왜인고 하니, 회화의 역사는 지나치게 긴데 반해 전제는 앞에서 말씀드렸듯 너무도 적기 때문이랍니다. 그마저도 ’보는 그림‘은 20세기에 와서야 정립되었기에 사실상 ’약속된 평면 위에 재료를 사용한다‘는 전제 하나가 미술사 전체를 포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회화가 존재한 시간에 비해 걸려 있는 제한은 너무 적으니, 화가들은 시대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재료와 사고방식, 이념, 사상, 방법을 골라내면서도 다른 이와 겹치지 않도록 무진장 고민을 해야 했더랍니다.
결국 그렇게 수없이 많은 화가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면서 그 화가들의 수만큼 좌표 위의 점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후대의 화가들은 또다시 그들을 피해 다른 방향을 잡아야 했고, 이 상황이 반복되면서 사실상 나올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나와 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과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현재의 작업이 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자기 작업의 계보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보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면, 작업은 그냥 취미와 전혀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즉 현대의 회화는 자신의 좌표를 명확히 정하고, 다른 이들과 겹치지 않게 과거와 연결된 아름다운 그래프를 그려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기술적인 측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풍경을 그릴 때 단순히 돌을 돌처럼, 나무를 나무처럼, 바다를 바다처럼 그리는 일은 솔직히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지요. 그런 일은 이미 과거의 마스터들, 이름만 말해도 다 아는 화가들이 훨씬 더 위대하게 해냈으니까요.
현대미술이 본격적으로 어려워지는 시기에 자신의 좌표를 찍어 놓은 피카소만 해도 그렇습니다. 10대 초중반에 이미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술을 자랑했던 그에게 기술을 더 연마하는 일이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요? 게다가 지겹도록 많은 아카데미 회화들을 접하면서 자란 당대 사람들에게, 피카소는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을까요? 그가 아마 자기 기술에 만족했다면, 한때의 신동 정도로 평가받다가 죽었을 것이고 역사상 최고의 화가는 아마 다른 사람이 차지해 버렸을 것입니다.
피카소는 기술을 버리려고 평생 노력하는 한편, 서양미술사의 핵심인 원근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려고 애썼지요.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성과 지각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바닥으로 처박혔기에, 소위 낙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더 이상 매력이 없어졌으니까요. 이미 그는 세잔의 영향을 짙게 받음으로써, 기하학에 따라 고정된 시점으로 바라보는 일은 실제 우리의 인식 방법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세잔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결국, 그림을 마치 실제처럼 보이게 하려던 기존의 기하학적 원근법을 더 잘게 쪼개 버리는 일이 필요했지요. 이는 피카소가 서양화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했을 뿐더러,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겪은 세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물을 입체가 아닌 평면으로 인지하기에, 그것이 입체라는 것을 알려면 빙 돌아가면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갈 ‘시간’과 뒤쪽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피카소 등 입체주의 화가들의 그림에는 이 ’시공간‘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억지로 재현하려고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림이 완전히 ’평면‘화되었지요. 피카소는 사실주의를 체화하고, 인상주의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여야 함을 알고, 세잔의 그림을 보며 세상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사실주의 - 인상주의 - 세잔으로 이어지는 계보와 각각의 좌표들을 너무나 철저히 연구했기에 본인의 방법론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피카소 등 과거의 대가들을 논하자면 날밤을 새도 모자라니 이제는 제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앞의 두 글에서 제가 말씀드린 과정들은 전부 계보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료에 대한 정당성, 개념에 대한 정당성을 캐묻다 보면 결국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숙고해 보게 되니까요.
저는 정치사회적으로는 냉전 종식 이후 최초의 세대에 속합니다. 대한민국 안으로 한정하면 이 세대는 외적으로는 이념 대립과 거리가 멀지만, 그 안에는 이전 세대에서 성행했던 이분법적 갈등의 자취가 남아 있지요. 또한 저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중심에 살았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사는 기간이 훨씬 길기는 하겠지만요. 아무튼 우리는 그야말로 과도기 자체인지라, 이전과 이후 세대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겨우 철들 무렵부터, 외환 위기의 공황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던 부모님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자란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 이후에는 각종 경제 위기를 직격으로 맞고 불경기가 계속되면서 본인들마저도 안정을 찾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선거철마다 전국민의 통합을 기치로 내건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이 세대는 통합의 구심점이 될 만한 어떠한 가치관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막말로 대관절 올바른 통합이 어떤 것인지를 한 번이라도 보기는 했어야 말이지요. 게다가 정보가 풍부해지면서, 우리는 가뜩이나 각박하고 다양한 현대 사회에서 이전 세대가 부르짖는 방식의 통합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이 시대의 사람들을 통합한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다는 사실도, 탈냉전 이전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피상적인 대화를 할 이유도 시간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으니까요. 자기 밥그릇 챙기기도 힘든 것이 제 나잇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속한 세대는 정신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시장에 상품은 넘쳐나지만 내 것은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자기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화려하게 살지만 누군가는 방 안에서 홀로 죽어가는 일이 계속 늘어나고요. 청년고독사, 투기성 지출, 각종 1차원적인 매체들의 난립이 이를 증명합니다. 또한 얼마 전 일어난 교사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우리가 얼마나 이전 세대와 격렬한 갈등을 빚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막상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좋은 것은 딱히 없는 상태이지요. 모순들을 경험했다면 그 악순환을 끊고 거듭나야 하는데, 그럴 방법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모순을 답습하는 모습까지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결국 제가 속한 세대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과도기, 분열, 갈등, 모순 등이군요. 어째 좋게 들리는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다가 과거에 예견된 현대인의 양상을 빼다 박아 놓은 듯해서 영 씁쓸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나타난 표현주의, 입체주의, 다다이즘 등과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두 황폐해진 인간성을 목도한 이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이념 갈등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고 나서 탄생한 그 사조들과 달리 저는 그 참혹한 몰골을 직접 본 적도, 비슷한 수준의 상황에 처해 본 적도 없습니다. 빠르게 이전의 폐허를 회복하면서 생기는 양상들과 달리, 저의 세대는 고도성장과 공동체적 혼란이 일어난 기간을 다 지나 태어난 만큼 그와 반대로 정신적 정체 상태를 겪고 있지요. 즉 우울과 침체가 지배적인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은 비슷하나 그들처럼 급변하는 사회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제게 세상이 어딘가에 달라붙은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제가 정체된 이들,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 중 하나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물감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모양새를 통해 저마다 고유한 무엇을 안에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싶지요. 그 힘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할 테니까요. 즉 저의 계보는 20세기 초중반에서 시작해서, 격변이 지나간 이후라는 유사한 상황을 겪은 사조들이 어떤 경향성을 보였는지로 이어집니다. 정체 상태에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는 것이지요. 다만 과거의 그들이 추구했던, 회복과 재건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것을 가져오려는 변화가 아니라 기존에 이미 갖고 있는 성질을 다시금 끄집어내는 변화를 담아내려고 합니다. 그 부분이 과거와의 차별점이자 저만의 그래프를 그릴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제 작업관을 설명하느라 쓸데없이 많은 글자를 썼습니다. 저도 한 번은 제대로 정리할 기회가 필요했기에 좀 길어지더라도 구구절절 다 써야만 했던 것 같네요. 짧은 글로는 도저히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럴 수도 없는 내용이기도 하고요. 화가들이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자신의 개성을 탐구하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재료, 개념, 계보로 이어지는 정당성 시리즈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번에는 좀 쉽게 읽힐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서 글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