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은 저녁,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아이들이 테이블로 찻잔을 들고 와 앉았다.
색연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와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작은 식탁 위에서 느리게 섞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는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일 이야기, 사람 이야기,
요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러다 문득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너희에게 미안한 건 많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그때보다 더 열심히 살 수도 없고
그때보다 너희를 더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엄마, 이보다 어떻게 더 사랑을 줄 수 있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랜 세월
내 마음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묶여 있던 매듭 하나가 툭 하고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나와의 화해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자책도 아니고
후회도 아니고
나를 불쌍히 여기는 연민도 아니다.
그저 이제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용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는 꽤 오래 ‘배고픈 애벌레’처럼 살았다.
언젠가는 나비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먹고
버티고
싸우며
살아왔다.
어릴 적 읽던 그림책 속에서
애벌레는 고난을 견디면 마침내 나비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만났다.
“내가 꼭대기에 올라가 봤는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마흔을 넘고
쉰을 지나
나는 어느덧
폭풍우가 지나간 삶의 언덕쯤에 서 있다.
아이들은
내 슬하를 떠나
자기 삶을 살고 있고
평생 매달려 왔던 직장에도 이제는 ‘퇴직’이라는 마침표가 찍히려 한다.
남편과도
예전처럼 크게 싸울 힘도 없고
굳이 싸워야 할 이유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
돌아보면
내가 그렇게까지 올라가려 했던 그 ‘기둥’이 대체 무엇이었는지조차 희미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온 뒤에야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평생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왔던 한 장면이 있다.
아들의 버릇을 바로잡겠다고 화를 참지 못하고
매를 들었던 그날.
작은 움직임조차없이
울음을 참아내며 부당함을 표현하던 아이의 얼굴,
그날 이후
내 마음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그렇게 사과했지만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다는 아들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를 향한 미움이 아니라
험한 세상 속에서
아이가 상처받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랐던 서툰 엄마의 두려움이었다.
요즘은 남편의 얼굴도 전과는 다르게 보인다.
‘가장’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내려놓지 못했던 사람.
그 이름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외로움과 책임을 혼자 견디고 있었을까.
그의 뒷모습에 서려 있던 고독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헤아려가고 있다.
삶의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폭풍 같은 세월을 지나며 생긴 내 날개의 흉터와
곁에 있는 사람들의 지친 날개를 조용히 안아 줄 수 있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애벌레가 꿈꾸던 나비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건넨다.
“그동안 미안했어.”
“정말 고생 많았어.”
그리고 이제야 묻는다.
“이제 우리 진짜 화해할까?”
나에게
인생의 꼭대기라는 곳은
어딘가에 도착하는 자리가 아니라
비로소
나 자신을 용서하게 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2026.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