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기로 했다.
"노후에는 어떤 집에 살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걸어서 갈 수 있는 시장, 도서관, 병원, 공원이 가까운 곳.
이제는 멀리 나가는 것보다 한걸음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삶이 편하다.
아파트의 동 간 거리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수록 안정된 숨구멍이 되어 주고,
놀이터 옆 벤치에서 앉아 있는 노부부를 보며, 나도 저렇게 익숙한 풍경 안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난 1년간 매주 주말이면 낯선 동네를 걸었다. 일반 아파트는 물론이고 고령자복지주택, 공공임대주택… 주거지마다 조건도 다르고, 매매 절차도, 분위기도 달랐다.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전문가 인터뷰도 들었다. 입지와 가격, 마을 분위기와 복지 수준까지 살폈지만, 정작 나를 가장 오래 붙잡았던 건 ' 이곳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라는 상상이었다.
식물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도심의 잡초는 숲에서 밀려난 존재들이다. 더 크고, 더 빠르게 자라는 경쟁자들에게 밀려 도시라는 환경에 적응한 결과다. 찰스 다윈의 말처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후미진 골목의 그 흔한 풀도 변화를 택하는데, 사람이 어찌 현실을 외면할 수 있을까.
결국 내가 선택한 건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20년 된, 오래된 구축 아파트였다.
지난 1월, 25년을 산 분당을 떠나 죽전으로 이사를 왔다. 수많은 조건을 따졌지만, 마지막에는 ‘돈’과 ‘교통’ 앞에 한 걸음 물러섰다. 출퇴근이 편리하고, 적당히 도시 가까운 곳. 더 이상 완벽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도심의 풀처럼, 조용한 타협을 택했다.
퇴직 후의 생활비는 한정돼 있고, 낮은 매매가와 관리비는 나에게 ‘선택’이 아닌 ‘현실’이었다.
수영장, 피트니스, 정원 관리 등 최신 편의시설이 적어 오히려 공용관리비 부담이 적다.
구축 아파트의 심플한 구조는 불필요한 집안일을 줄여주었다.
특히 넓은 베란다는 화분 가꾸기를 좋아하는 나의 취미생활에 안성맞춤이고,
캠핑의자를 놓으니 새로운 여유 공간이 생겼다.
사람 냄새나는 단지도 좋았다.
매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얼굴,
‘오늘은 더우시죠?’ 하고 말을 건네는 이웃,
하루가 편안해지게 느껴졌다.
게다가 재건축에 대한 기대도 살짝 해본다.
그 사실이 나를 들뜨게 하진 않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이 있다는 건 자식들에게 남겨줄 자산으로도 나쁘지 않다. 욕심 없이 산다지만, 그들 몫까지 생각하게 되는 게 또 부모의 마음이니까.
나는 이곳에 내 노후를 담기로 했다.
조용하지만 생활의 리듬이 살아 있는 곳.
새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만들어낸 묵직한 안심이 있는 곳.
그게 바로 지금의 나에게 ‘좋은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