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흘러가는 이정표

by 도윤

철학이라는 대해에서 부표를 세워놓고 머무르지 않는다. 세워놓거나 길이나 산등성이에 깃발을 꽂아 이정표를 만들고 홀연히 사라지거나 흘러간다. 철학자의 운명은 이상하다. 평생을 바쳐 하나의 사상을 세워놓지만, 그 자신은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등대지기가 등대를 켜놓고 밤바다로 떠나는 것처럼, 철학자는 자신이 세운 이정표를 뒤로하고 떠난다.


왜 그들은 머물지 않는가? 왜 자신이 세운 성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떠나는가? 아마도 진정한 철학자는 모든 사상은 부표일 뿐이라는 걸 안다. 진리의 대양에서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일 뿐,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그 부표에 묶여 있으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세운 부표는 후대 항해자들을 위한 것이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유의 자유는 과거의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고, 자신이 세운 체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만든 개념에 속박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게 한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이전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라 해도 홀연히 흘러간다. 철학의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진정한 철학은 머무름이 아니라 흐름이다. 고정이 아니라 운동이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어제의 확신에 갇히지 않고, 오늘의 의심을 받아들이며, 내일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게 철학 하는 삶이다.


철학자의 운명은 이상하다. 평생을 바쳐 사상을 세워놓지만, 그 자신은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등대지기가 등대를 켜놓고 밤바다로 떠나는 것처럼, 철학자는 자신이 세운 이정표를 뒤로하고 떠난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그려놓았지만, 그 자신은 계속 대화편을 쓰며 질문을 던졌다. 완성된 체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했다. 왜 그들은 머물지 않는가? 왜 자신이 세운 성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떠나는가?


아마도 진정한 철학자는 안다. 모든 사상은 부표일 뿐이라는 걸 진리의 대양에서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일뿐이라는 걸 안다. 그 부표에 묶여 있으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철학이라는 대해는 끝이 없다. 한 사상가가 평생 탐험한 영역은 그 광대한 바다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가 세운 부표는 후대 항해자들을 위한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왔다.", "이 방향으로 가면 이런 게 있다", "이 암초를 조심하라"와 같은 신호들 말이다.


산을 오르는 등산가도 마찬가지다. 정상에 깃발을 꽂는 건 중요한 의식이다. 하지만 진짜 등산가는 그 깃발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음 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깃발은 뒤따라오는 이들을 위한 표시일 뿐, 자신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다.


이정표를 만든다는 건 책임이다.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는 것. 하지만 이정표를 만든 사람 자신은 이미 그 길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홀연히 사라지거나 흘러가는 건 철학자의 숙명이기도 모든 사람의 숙명이기도 하다. 자신이 세운 체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만든 개념에 속박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설령 그것이 자신의 이전 사상을 부정하는 거라 해도.


후대 사람들은 그 이정표를 보고 따라온다. 플라톤주의자, 칸트학파, 니체주의자들 하지만 그들이 그 정표에 머문다면 그들은 스승을 배반하는 거다. 진정으로 스승을 따르는 건 스승이 세운 곳에 머무는 게 아니라, 스승이 간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거다. 철학의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본다. 한 사람이 부표를 세우면 다음 사람은 그 부표를 이정표 삼아 더 나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부표를 세운다. 그렇게 사유의 지도가 그려진다. 하지만 그 지도는 영원히 미완성이다. 진리의 대양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철학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사상을 교조화한다. 그 이정표를 신전으로 만들고 그 부표를 신성한 것으로 모신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은 스승의 진정한 정신을 배반한 거다. 스승은 떠나라고 나아가라고 자신을 넘어서라고 말했는데 제자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철학은 머무름이 아니라 흐름이다. 고정이 아니라 운동이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들은 모두 여행자였다. 정신의 유목민이었다. 한 곳에 텐트를 치지만, 언제든 걷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선현들이 세워놓은 이정표에 감사하되, 그곳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가되, 그들이 간 길만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그들도 새로운 길을 개척했듯이, 우리도 우리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철학이라는 대해는 여전히 광대하다. 세워진 부표들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여기까지 누군가 와봤다는 확신을 하지만 동시에 재촉한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저 너머에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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