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풍경 속에서 찾은 이정표
내 삶을 움직여온 건, 대단한 가르침이 아닌 사소한 장면들이었다. 누군가의 조언보다 순간의 공기가 더 오래 남았고, 그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기준과 방향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집은 각자 살아내기에 바빴다. 자생적 환경 속에 대부분의 선택은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그 환경 덕분에 남의 말에 휘둘리기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쪽’을 고르는 능력이 나를 지탱한 기반이 되었다.
불편했던 장면들 역시 중요한 기준을 세워주었다. 사회생활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 선을 넘는 무례함 속에서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선명한 경계가 그어졌다. 타인의 붕괴 속에서 최소한의 윤리적인 선을 지키는 것은 선택이 아닌 기본이어야 함을 절감했다.
반대로 작고 따뜻한 장면에서 배운 것도 많았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친절, 자연스럽게 나누는 여유 같은 인간적 환대가 세상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중국에서 유학하며 삶의 무게가 모두 같은 수평선 위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보았다. 아침 산책을 나가면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가볍게 넘길 그들의 묵묵한 일상이 새벽 공기 속에서 똑같은 존엄을 갖고 흘러가고 있었다. 제 몫의 일을 정성껏 하고, 낯선 이방인 유학생의 인사에도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덤 하나를 더 얹어주곤 했다. '아, 저렇게도 여유를 줄 수 있구나.' 하는 그것은 동정이 아닌, 자기 삶에 긍지를 가진 자들만이 베풀 수 있는 넉넉함이었다. 어릴 적 손가락질하며 ‘피해야 하는 일’처럼 들리던 기준들이 사실은 사회가 임의로 만든 틀에 불과하다는 걸 조용히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곁을 오래 지켜준 사람들에게서 요란하지 않은 힘을 배웠다. 과하게 말하지 않고, 무엇보다 질문으로 감정을 흔들지도 않는다. 대신 행동은 늘 일정하고 조용하다. 이는 과함 없이, 규칙적인 기류로 중심을 잡아주는 힘이 있다. 그들이 건네는 적당한 거리의 고요 덕분에 나는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낀다.
결국 내 삶을 움직인 건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감각이었다. 결핍은 내면에서 소리 없는 묵직한 추진력이 되었고, 부족함은 불안이 아닌 조용히 움직일 동력이 되었다.
나는 사람의 말에 휘둘리기보다 장면을 관찰하며 배운다. 불편했던 장면은 ‘살아가지 말아야 할 방식’을 세워주었고, 좋은 장면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었다. 내게 장면들이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삶의 정답을 찾아가게 하는 이정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