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by 배고픈 애벌레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종이를 채우면 돈이 생겼다. 한 장 한 장에 가격이 매겨지고, 쓰면 쓰는 만큼 통장 잔고가 늘어났다. 출퇴근을 반복하며 야근을 불사했던 직장 생활에 목을 매지 않아도 종이를 채우면 전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이 들어왔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면 나는 기계처럼 흰색 종이에 검은 글자를 집어넣었다. 기일 내에 원고를 넘겨야 하기에 시간에 쫓기기는 했지만 자유롭게 책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부족하지 않았다. 집 가까이에 있던 작은 도서관이 나의 사무실이 되었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종이를 메꾸었다. 임신을 해서 배가 점점 불러올 때도, 지하 매점에서 천 오백원짜리 잔치국수와 냉동 돈가스로 끼니를 때우며 성실하게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쌓여 있는 원고와 마감일의 재촉에도 그것이 노동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종이를 채우는 일은 일상이 되었고, 사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 원고가 완성되고 내 이름이 인쇄되어 나오는 책을 받아보는 기쁨도 쏠쏠했다.


흰색 종이를 앞에 두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익숙한 백지 한 장이 오늘은 넘어야 할 태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원고료를 받는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마감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이를 채우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 속에 담길 내용이 다르기 때문일까? 글을 읽게 될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고개를 들면 마주하게 되는 네모진 흰 벽이며 문, 창도 채울 수 없는 종이처럼 나를 괴롭힌다. 어지러운 마음 탓일지도 모른다. 어울리지도 않은 옷을 입고 연기하며 사느라 본연의 나를 잃어버린 탓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단순하게 살고 싶었는데 실상은 나의 바람과 달리 더 복잡하게 얽혀졌다. 삶을 향유하지 못하고 늘 풀어야 할 숙제처럼 끌어안고 있는 내가 보인다. 종이는 종이일 뿐인데 나는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스스로 몰아붙이고 있다. 노트북을 힘주어 닫아 버렸다. 그리고 내가 쓰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왜 쓰려고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는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자신을 더 잘 알며, 다른 사람과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한다.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꿈, 기쁨, 삶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글이 힘이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할까? 글을 쓰는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나 자신도 위로하지 못하면서 글로 남을 위로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글쓰기가 내게 꿈이고 삶이라고 확언할 수는 더더욱 없다. 내 글이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는 무언가를 써서 백지를 채우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글을 쓰면서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삶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고 싶다. 소유와 성취만으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마음의 공허를 달랠 수가 없다. 흰 종이가 검은 글자로 채워질 때 느꼈던 충만함과 새로움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기에 인생의 덧없음을 털어내기 위해 활자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행위 또한 때로는 속절없는 울림으로 메아리 되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고통과 절망의 순간을 지나온 것을 자축하기 위해서…… 나의 겨울을 따뜻하게 함께해준 누군가를 추억하고, 팍팍한 현실에서 잊고 지내던 이상을 회복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백지 한 장 채우기가 이전만큼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부족함과 모순된 인격, 실수와 후회로 가득한 삶의 파편들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은 것이다. 비우고, 지우고 싶은 것들이 아름다울 리 없다. 그러나 활자로라도 외면하고 싶은 덧없는 상념을 끄집어낼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게 된다. 세상에 자랑할 것은 없지만 부끄럼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나마 한 장 종이 위에 가득 담아 볼 수 있지 않을까? 닫았던 노트북을 열고 흰색 화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앉는다. 그늘진 감정과 생각들을 백지 위에 쏟아놓고, 내 마음 깊은 곳은 순백의 공간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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