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길을 걷다

태고의 신비와 숨결을 느끼며 나답게

by 배고픈 애벌레

겨울밤, 길을 걷다


회색빛을 품고 찌푸리던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 반짝이는 밤이다. 겨울밤은 안과 밖이 모두 고요하고 평안하다. 아프고 요동쳤던 날들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잠잠하다. 순간, 그 어떤 환경이나 사회에 속박되지 않은 자연인이 되어 하얀 겨울 왕국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 본다.


눈길 위로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내디뎌 본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알 수 없는 미래에 헛된 희망의 표지판을 세우지도 않은 채 그저 길 위에 발 도장을 쾅쾅 찍으며 걷는다. 가끔 뒤를 돌아 내가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보는 것이 흐뭇하다. 한참을 걷다 힘이 들면 눈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뭇가지 위에 핀 눈꽃을 머리 위로 흩뿌려 본다. 그리운 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면 눈을 뭉쳐 굴린다. 눈 뭉치가 커지면서 그 형태가 분명해진다. 커다란 눈덩이 위에 또 다른 눈덩이를 포개 놓고 눈, 코, 입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보고 싶은 이의 이름을 붙여 나지막이 불러본다. 눈사람이 하나둘 늘어가며 나의 주위를 둘러친다. 차디찬 눈사람을 감싸 안는 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눈사람이 내미는 등에 기대 무거운 몸을 쉬게 한다.


다시 몸을 일으켜 보니 세상은 온통 하얗다. 어디든 내가 걸어가는 곳이 길이 된다. 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 느리게 걷는다고 질책할 사람도 없고, 서두른다고 더 나은 길에 닿을 것도 아니다. 이전부터 있었던 길이라는 것도 눈이 내리면 언제 덮여 없어질지 모른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과거의 어떤 업적이나 흔적이 아닌 오직 지금의 나로 입증될 뿐이다. 삶의 권태와 불안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연약한 나의 모습만이 더 선명해진다. 봄은 짧게 머물다 지나갔고, 꽃들은 금세 시들어 더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여름내 수고하며 가을의 결실을 기다렸지만 탐스러운 과실을 품에 안기까지 바람이 불면 떨어질까, 새가 쪼아 망칠까 전전긍긍하느라 가슴은 이미 까맣게 타버렸다. 그러니 무엇을 지키고, 생산해야 한다는 과도한 기대와 필요가 없는 겨울이 얼마나 좋은가?


눈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태고의 신비와 숨결을 느끼며 안도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작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세상사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나는 늘 넘어지고 실패하곤 했다. 실존적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 몸집을 키우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도 했지만 그럴수록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허무가 고개를 들었다. 결국 나는 눈길 위에 떨어진 작은 눈송이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추운 겨울의 흰 눈길, 모든 부끄러운 흔적을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의 점으로 본래의 나를 인식할 수 있는 곳. 겨울 왕국의 길 위에 홀로 서 있는 지금 나는 가장 나답다. 커지려고 했던 욕망에서 놓여 그 무엇이 되지 않고도 자유로운 시간, 밤이 새도록 걷고 걸어도 좋을 아름다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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