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오는 길에 이용했던 항공편은 7시간의 비행 동안 물 한 컵을 주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은 생수 한병이라도 사서 타는 거였는데. 아니 근데 아무리 저가항공이라지만 항공권이 대단히 싼 것도 아니었는데, 짧은 시간도 아니고 물 한 컵 정돈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화도 났다. 기내에서 물을 사 마시기엔 돈 쓰기가 억울해서 내릴 때까지 꾸욱 참았다.
우리는 바짝 마른 입술로 헥헥 대며 산토 도밍고 공항에 내렸다.
"이때까지 가장 힘든 비행이었다."
"휴우.. 나도. 근데 비행 전에 틀어주는 음악 되게 좋더라. 음악만으로 치면 최고의 비행기였어 하하."
진심이었다. 똥땅똥땅 귀여운 타악기 소리와 신나는 멜로디가 섞여 저절로 흠흠흠 콧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캐리비안의 음악이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산토 도밍고의 메인 거리로 나왔다. 어딜 가나 공통점이 있다면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음식점이든, 마켓이든, 기념품 매장이든 어김없이 음악이 흘러나왔고, 마치 배경음악을 동력으로 하여 굴러가는 건가 싶을 정도로 도로를 지나는 차들도 하나같이 흥겨운 캐리비안 리듬을 타며 간다.
콜럼버스 동상
메인 거리에는 콜럼버스 공원을 중심으로 로맨틱한 분위기의 음식점들이 많다. 거리는 전체적으로 유럽풍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콜로니얼 센터라고 부른다.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을 당시 스페인 침략자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세운 도시라서 그렇다. 콜럼버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콜럼버스 동상이 서 있다. 왼팔을 쭈욱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는 모습이 '저기다. 내가 발견한 땅!'이라고 외치는 것 같이 생겼다. 나는 콜럼버스가 싫다. 엄연히 정착하여 살고 있는 본토 주민들이 있는 땅에 들어와서 본인이 주인 행세를 했고,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으며, 어떤 땅은 스페인 왕가에 선물로 바치기도 했던, 오만한 침략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가 떡하니 남의 나라 수도의 광장에 동상으로 서 있는 게 못 마땅하다.
이곳 현지 가이드들은 관광객들에게 산토 도밍고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도시이며, 첫 병원, 첫 대학 등이 있는 곳'이라며 소개한다. 이 멘트도 마음에 안 든다. 식민지화 전에는 그럼 이 땅에 도시가 없었겠는가. 병원도 없고 학교도 없었겠는가 말이다. 유럽인들이 마음대로 신대륙이라고 이름하며 자기들 입맛대로 지어버린 이 도시를 아메리카의 첫 도시라고 칭하는 건 우습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세운 첫 도시'라고 이름한다면 납득하겠다.
큰 나무 아래서 손 가는대로 붓을 놀리는 예술가
도미니카 공화국의 유명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인 판테온 데 라 파트리아
오자마 요새
오래된 성당 뒤로 보이는 분홍색 구름이 참 예쁘다
산토 도밍고에 초저녁이 오면은은한 석양을 품은 구름이조명보다도 밝게 거리를 비춘다.도시 자체가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욱 하늘이 돋보인다. 강렬하게 튀는 소리는 없지만 여러 악기들이 각자 겸손하게 소리를 내며 조화를 만들어 내는 캐리비안의 음악과 닮았다.
어르신들은 작은 보드게임판을 벌이고 계신다. 색색의 토큰을 이용한 게임, 주사위처럼 점이 새겨진 작은 블록을 가지고 하는 게임 등 이름 모를 게임이었다 (둘 중 한 게임은 후에 멕시코에서 직접 해볼 기회가 온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동네 친구들과 놀고 계신 어르신들을 보니 나도 한판 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그냥 재미로 하시는지, 오늘 밤 맥주 한잔을 걸고 하시는지도 궁금했다.
밤은 음악인들의 시간이다. 걷다 보면 기대치 않았던 숨은 진주 같은 가수들을 많이 만난다. 남편은 젬베를 두드리고 아내는 마라카스를 흔들며 멋진 하모니를 자랑하는 노부부, 앞을 잘 볼 수는 없지만 목소리로 감동을 주는 어느 가수, 시청 밑 아치에 기대어 아무 반주 없이 오로지 천상의 노랫소리만으로 심금을 울리는 소프라노 성악가 등.
"아니 저분은 여기가 아니라 방송에 나오셔야 할 것 같은데?"
"그러게 숨은 실력자들이 많네."
산토 도밍고 시청의 야경
다음 날엔 시내 밖으로 택시를 타고 15분쯤 나가 Three eyes라는 세 개의 맑은 호수를 보러 갔다. 동굴 안으로 내려가면 너무나 맑아서 조금 무섭기까지 한 청록빛의 물이 나온다. 작은 배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면 밀림에서 볼 법한 나무줄기들이 얽힌 사이로 또 다른 호수가 보인다. 그 풍경이 꽤 멋있다.
돌아오는 길 배를 태워주시는 직원분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신다.
"호수는 어땠어요?"
"좋았어요!"
"잘됐네요. 여기 뱀도 나오는데 혹시 봤어요?"
"흐익..! 네에? 정말요?"
"아, 걱정 마요. 백인만 무는 뱀이거든요."
"네에? 아 뭐예요, 하하하."
뼈 있는 농담에 다 같이 웃었다.
뙤약볕에 오래 걷고 나니 달고 수분 많은 과일이 당겨서 마트에 갔다. 바다를 건너 오니 과일이나 채소의 크기와 모양도 생소하게 변해있다. 생김새만큼이나 또 가격도 낯설다. 귤을 제외한 다른 과일들은 우리나라와 비교도 안되게 저렴하다.
손바닥을 훌쩍 넘어가게 큰 아보카도
아보카도를 귀여운 수레에 담아 다니며 파시는 분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가격표가 있었으니 바로 애플망고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비싼 축에 드는 과일들 중 하나인 애플망고.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그 가격이 하나에 불과 700원가량이었다. 맛이 있든 없든 우선 싼 맛에 하나를 샀는데, 먹어 보니 맛까지 일품이다!
그날 저녁에만 세 개를 더 샀고, 이후로 매일 적어도 한 개씩은 사 먹었다. 귀국하면 다시 금값일 텐데 여기 있는 동안 많이 먹어둬야지. 원래 애플망고는 껍질 색이 붉어져야 잘 익은 건데, 신기하게도 여기 애플망고는 껍질이 파릇파릇한데도 과육이 부드럽고 당도가 굉장히 높았다. 아직도 그 단맛은 잊질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