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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소굴에서 세계적 관광지로, 그리고 그 이면.

콜롬비아- 메데진

by 소울메이트


"여기가 정말 위험하다고?"

콜롬비아 '메데진'이라는 도시에 첫발을 디디며 어리둥절해진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치안이 나쁘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 선한 인상의 주민들. 웬만한 선진국 못지 않게 편리한 대중교통. 사랑스럽기까지 한 착한 물가. 그런데 이곳이 과거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던 마약 소굴이었고, 지금도 그다지 마음 놓고 여행을 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메데진을 첫인상만 보고 안전지대라고 착각할 만도 했던 것이, 이 도시에서 우리를 재워줄 카우치서핑 호스트 '페르난도'가 사는 동네가 사실은 굉장한 부촌이었던 것이다. 후에 동네 밖으로 벗어나 메데진의 속살을 하나둘씩 게 되면서, 집 주변에서만 보던 풍경은 소수의 부자들이 누리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페르난도는 혼자 사는 젊은 사업가였고, 그는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아파트의 고층에 살고 있었다. 전망 뿐 아니라 복지도 좋았다.

"우리 아파트에는 수영장이랑 사우나가 있어서 거주자들이 원하는 만큼 이용할 수 있어. 너희도 지내는 동안 마음껏 써도 돼."

페르난도의 말에 우린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에겐 아파트에 사우나가 딸려 있다는 자체가 충격이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콜롬비아 대부분의 아파트는 사우나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아참. 오늘 내가 일 때문에 보고타로 출장을 가야 하거든. 그래서 너희와 같이 시간을 보내기는 힘들 것 같아. 미리 말을 못해줘서 미안해. 한 3~4일 안에 돌아올 수도 있는데 더 길어질 수도 있어."

페르난도는 그렇게 저녁 비행기를 타고 보고타로 떠났고 우리가 메데진을 떠날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만난 사이인 우리에게 집열쇠를 복사해서 손에 쥐어 주었다. '지금부터 이 공간은 너희의 집이나 마찬가지이니 집안의 모든 건 맘껏 쓰고 편히 쉬어라' 라면서. 우리는 넓고 깨끗한 그의 집에서 마치 호텔에 체크인한 기분으로 4일을 지냈다. 무엇보다 우릴 감동시켰던 건 첫만남임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가 보여준 무한한 신뢰였다.


카우치서핑에서 누군가를 호스팅할 때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린 고마움의 표시로 페르난도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무엇이 괜찮을까 하다가 그가 보고타로 가기 전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페르난도는 집 근처에 자주 가는 맛집이 있다며 우릴 안내했다.

식당에 가자 친절한 종업원 아주머니께서 맞아주셨다. 프와 메인요리와 음료까지 시켜서 세 사람이 푸짐하게 먹었다. 특히 '산꼬초'라는 닭고기 및 여러 야채가 들어간 수프와 튀긴 생선이 맛있었다.

산꼬초(좌), 호박수프(우)

구운 소고기(좌), 튀긴 생선(우)

놀라웠던 건 이렇게 먹고도 전부 해서 10달러가 안되게 나왔다는 것이다. 콜롬비아의 물가는 쿠바에서 만큼이나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점심을 먹으며 페르난도는 우리에게 콜롬비아의 기본 스페인어 인삿말을 가르쳐주었다. 아침인사는 '부에노스 디아즈', 점심에는 '부에노스 따르데스', 저녁에는 '부에나스 노체스'. 처음엔 기억하기 어려웠는데 나중엔 자주 쓰다 보니 입에 붙었다. 현지인들이 그냥 짧게 '부에나스!'라고 인사하기도 하는 걸 듣고 그대로 따라하기도 했다.

페르난도가 알려준 콜롬비아에 대한 지식 중 흥미로운 것들이 꽤 있었다.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는 사실 과거에 한 나라로 묶여 '그란 콜롬비아'라고 불렸다고 한다. 금은 여러 나라로 해체되었지만 국기만 보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모두 비슷한 것에서 과거 그란 콜롬비아였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콜롬비아의 기후 역시 계절의 구별이 뚜렷한 나라에서 온 나와 남편으로서는 아주 신기했다. 콜롬비아는 일년 내내 지역마다 기후가 거의 일정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메데진은 연중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날씨이고, 조금 떨어지면 일년 내내 춥기만 한 지방도 나오며, 캐리비안 해안가는 매일같이 무더운 날씨가 계속된다고 했다. 다른 날씨를 경험하려면 계절이 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원하는 날씨를 가진 지역으로 이동만 하면 된다는 게 리에겐 새롭기만 할 따름이었다.


강 건너로 보이는 빈민가


메트로를 타고 가다 본 어느 벽화. 코뮤나13에 가까워졌다는 게 느껴진다.

페르난도와의 짧았던 만남이 끝나고 우리는 메데진을 방문한 주된 이유이기도 한 '코뮤나 13'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콜롬비아의 행정구역은 '코뮤나'라는 위로 나뉘는데 메데진은 16개의 코뮤나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코뮤나 13번이 바로 악명높았던 마약 카르텔의 우두머리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주 활동지였던 민가다. 1993년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사망하기 전까지 총과 마약, 살인이 그저 일상이었던 뮤나 13은 이후 정부의 노력으로 마을을 재건하고 치안을 개선하여 오늘날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메데진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코뮤나 13에서 기념품으로 팔리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신분증


코뮤나 13에 가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케이블카라고 하면 국내에서는 티켓도 비싸고 특별한 날에만 타는 것이었는데, 메데진의 케이블카는 메트로와 연결되어 늘상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었다.

메데진의 케이블카


코뮤나 13 도착



남미에서는 길거리에서 다수의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을 예사로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콜롬비아의 코뮤나 13은 골목 이곳저곳마다 배치된 군 인력은 물론이고 상공을 날며 광범위하게 시를 살피는 헬기까지 날아다닌다. 이렇듯 철저한 보호 속에서 코뮤나 13은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다. 피튀기던 범죄의 현장에서 지금은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 오르막에 설치된 편리한 에스컬레이터, 축구장과 농구장 등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 질 좋고 저렴한 길거리 음식, 자유분방한 춤과 노래가 있는 메데진의 가장 '핫'한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축구선수가 꿈이라는 어린 친구와 한장 찍었다. 역시 축구선수를 꿈꾸는 비슷한 나이의 조카 '야신'이 떠올랐다.




납작한 빵 위에 치즈를 가득 얹어 주는 길거리 음식. 고소하고 짭짤한 치즈 위에 달콤한 꿀이 뿌려져 고르곤졸라 피자와 비슷한 맛이 난다.



전망 좋은 곳을 찾아 걷고 있는데 8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실뜨기를 하며 우리를 따라왔다. 아이는 실뜨기로 여러 모양을 만들어 보여주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손에 손으로 실을 옮겨가며 놀았던 실뜨기 놀이가 이 아이에게는 돈을 버는 수단이었다. 작은 돈을 쥐어 주고 다시 길을 가는데 아이가 따라와 골목 옆의 한 집을 가리켰다. 아이의 가족이 사는 집이었다. 작은 문이 열리더니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밖으로 나와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아이에게 가족과 집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인사를 하고 다시 가던 길을 가는데 아이는 마을 높은 곳까지 계속 우릴 따라왔다. 뮤나 13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구멍가게 앞에 의자가 놓여진 곳이 나왔다. 가게에서 마실 걸 하나씩 사서 의자에 앉았다. 리를 라온 아이와 어느새 그옆에 같이 서있는 아이 또래의 친구 한명에게도 음료를 한병씩 사주었다.

아이들은 우리와 얘기하고 싶어했다. 언어가 안통해 번역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한국이랑 모로코.'

'둘이 결혼한 거예요?'

'응. 결혼해서 같이 한국에서 살아. 지금은 여행중이야. 너희는 형제야?'

'동네 친구예요.'

'그렇구나. 같이 학교 다녀?'

'네.'

얘기를 할수록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1시간 넘게 같이 얘기했다. 서로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긴 대화 끝에 실뜨기를 하던 아이는 가족이 기다린다며 집에 가보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우린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아이가 말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싶어요.'


몇년 전 있었다는 범죄자와 경찰 사이의 총격 속에 생겨난 철기둥 위의 총알 구멍.


우주를 담은 듯한 빈민가의 야경


카우치서핑 숙소의 옥상 전망

해가 지고 페르난도의 집으로 돌아갔다. 페르난도가 사는 아파트의 옥상에서는 언덕을 빼곡히 채운 집들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낮에 가까이서 본 빈민가는, 철골이 튀어나오고 허술한 지붕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집들로 들쭉날쭉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밤이 되고 멀찍이서 바라보자 마치 수억개의 별무리처럼 반짝이는 게 아닌가.

삶이란 그런 것일 터였다. 가난과 직접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빈민가의 주민들에게 현실은 아름다움이나 재미와는 거리가 멀겠지만, 먼 발치의 고층 빌딩에서 바라보면 그저 '야경이 예쁘다'고 하게 되는 그런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여행을 하다가 런 사실을 은연중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마다 등에 멘 배낭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어깨를 누른다.


우리는 아파트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누군가는 단 며칠의 바캉스를 즐기려 개인 전용기를 타고 단숨에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는가 하면, 언젠가 비행기를 타고 싶단 꿈을 가진 또다른 누군가는 단 몇푼의 동전을 벌기 위해 실뜨기를 하며 골목을 헤매야 한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마음이 시큰거렸다.


코뮤나13에서 몇년 사이 그들이 이뤄낸 변화는 놀랍지만 빈민가의 빈곤까지 모두 해결된 건 아니다. 비단 코뮤나 13 뿐 아니라 가난과 빈부격차는 계가 공통으로 앓고 있는 병이다. 마 영영 풀지 못할 숙제가 아닐까 한다.


그래도 모두가 잘 사는 유토피아가 마침내 온다면 디 우리의 세대가 끝나기 전에 오기를 소망한다. 한창 뛰어 놀 나이에 주머니에 돈을 보태기 위해 행인들을 좇을 아이도 없고, 아이의 고사리손에 탄산음료 한병을 들려 주고는 아서며 죄책감을 느낄 사람도 없는 세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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