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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공항에 갇힐 뻔하다

파나마 공항 해프닝

by 소울메이트

"파나마 관광할 생각 더 이상 없으니까 지금 바로 여권 돌려주세요!"
나와 남편은 성난 목소리로 파나마 공항 경찰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굳이 파나마에 온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시작은 이러했다.

멕시코에서 콜롬비아로 가는 길에 이왕이면 파나마를 경유해서 수박 겉이라도 핥아볼까? 그래 그러자!
해서 24시간가량 파나마를 경유하는 비행기표를 굳이 끊은 것이었다. 그랬는데 결과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거치는 중이었다. 모로코 사람이 파나마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특정 국가의 비자가 있거나, 또는 대한민국 체류를 입증하는 서류가 있으면 입국이 가능하다. 남편은 영국 비자와 대한민국 거주를 증명하는 외국인 등록증 둘 다 가지고 있어 파나마 입국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입국심사가 까다로울 것에 대비하여 미리 대사관에 문의해 '모로코인으로서 영국비자가 있거나 대한민국 체류 중이라면 파나마 입국이 가능하다'는 확인메일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우리는 당당하게 남편의 영국비자, 외국인 등록증, 대사관으로부터 받은 메일까지 한 번에 입국심사관에게 보여드렸다. 심사관은 처음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여권에 입국 도장까지 찍어주었다. 근데 문제는 그 뒤에 발생했다.
심사관이 남편의 여권과 외국인 등록증을 가지고 입국심사대 밖으로 나가더니 상관으로 보이는 다른 심사관과 무슨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편의 서류를 뒤적이며 잡담을 나누던 그들은 5분 정도 지난 뒤 우리를 불렀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네? 어디로 가는데요?"
"서류가 진짜인지 확인해야 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잠시 멍해졌다. 여권에 도장까지 다 받았는데 갑자기 서류 진위 여부를 판별하겠다니. 우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별수 없이 심사관을 따라갔다. 아무리 서류가 완벽해도 입국을 허락하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결국 심사관이기에 섣불리 거스를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통로를 지나가며 점점 불안해졌다. 우린 심사관을 따라 걸어가면서 물었다.
"저기.. 저희가 영국 비자 가지고 있는 건 보신 거죠?"
"네? 무슨 비자요?"
"영국이요. UK 비자요."
"UK가 뭐죠?"
"네?! United kingdom이요. UK비자가 있으면 파나마 입국 가능하잖아요. 아까 다 확인하시고 도장까지 주셨잖아요..?"
이럴 수가. 자국 입국 심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할 입국심사관이 아니던가. 근데 그의 입에서 UK가 뭐냐는 질문이 나온다. 아니 그럼 아까 심사대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도장을 찍어준 거야? 그리고 이제야 알아차린 건데 이 사람, 영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즉 좀 전에 입국심사에서 우리가 열심히 설명한 내용들을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는 거다.

'UK가 뭐죠?'에서 받은 1차 충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2차로 더 큰 충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데려간 곳에는 네다섯 명의 공항 경찰들이 서 있었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고, 남편은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그들은 나보고 밖에 서 있으라고 하고선 남편을 저편으로 끌고 갔다. 남편이 그들을 따라가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딱 봐도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나는 걱정이 되어 얼른 남편을 뒤따라 달려갔다. 그곳에는 서류 미비로 입국이 거부된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좁은 공간이 있었다. 이미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저희는 모든 서류를 완벽히 제출했는데 왜 여기에 있어야 하죠?"
우리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공항 경찰관에게 물었다. 아.. 불행히도 그들 중 아무도 영어를 할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핸드폰으로 번역기를 돌려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우리의 항변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안에서 서류 심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저 기다리라는 말뿐.

우리는 20분가량을 앉아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곳에 먼저 격리되어 있던 다른 승객들 중 한 사람이 경찰관에게 다가가 화장실에 가도 되는지 물었다. 그는 경찰관을 동행하여 화장실에 다녀왔다.
잠시 뒤 또 다른 두 사람이 경찰관에게 다가갔다.
"저기.. 저희가 12시간째 여기 있느라 식사를 못했어요. 잠깐 공항 안에서 밥만 먹고 돌아와도 될까요?"
돌아온 경찰관의 대답은 'No'.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격리공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반나절 동안 식사를 못한 사람들에게 돌아온 답변이었다.

상황 파악은 끝났다. 이곳에 한번 들어오면 24시간이고 48시간이고 저들이 우릴 내보내주기 전까진 한 발짝도 꼼짝할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그것도 최악의 변수. 단 하루 파나마에서 경유하려고 에어비앤비까지 예약을 다 해놨는데. 그 잠깐의 휴식이 송두리째 날아가게 생겼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먹지도 못하고 화장실도 자유롭게 못 가는 채로 오늘 밤을 새우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다음날 탈 콜롬비아행 비행기에 시간 안에 오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나와 남편은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건 항의해야 한다. 준비됐지? 오케이 렛츠고.
"익스큐즈미!"
우리는 경찰관에게 다가가 번역기의 힘을 빌려 다시 한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안에서 기다리라고만 하였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그거라도 알려 주세요."
"정해진 시간은 없습니다. 24시간이 될 수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이것 봐라. 우리 예상이 맞았다.
24시간이라니. 말도 안 된다. 누구 맘대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분명 서류를 제출하고 입국 도장까지 이미 받았어요. 그래도 진위 여부가 필요하다면 확인하셔도 되지만, 적어도 얼마나 걸리는지는 알려 주셔야죠. 그리고 진위 판별에 무슨 24시간이나 걸립니까? 그리고 저희는 파나마를 경유만 하는 거라 다음 비행기도 타야 하는데 기한 없이 어떻게 기다립니까?"
그럼에도 경찰관들은 무슨 녹음기처럼 '기다리라'라고 같은 말만 반복 재생할 뿐이었다. 어느 경찰관은 나를 보더니 뜬금없이 '오케이. 니하오. 니하오.' 하면서 calm down 하라는 손짓까지 보냈다. 살다 보니 공항 경찰에게 인종차별을 당하는 날도 오네. 되지도 않는 니하오 타령에 분노가 턱까지 올랐다. 저 정도 교육 수준으로 어떻게 공항 경찰이 되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진정하시고. 저희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럼 이곳이나 감옥이나 무슨 차이인가요? 저희는 범죄자가 아닌데 왜 갇혀 있어야 하지요? 파나마는 민주 국가 아닙니까? 민주 국가에서 승객을 이렇게 다뤄도 됩니까? "
좀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급기야 민주주의까지 끌어와서 반박을 했다. 그러자 한 경찰관이 갑자기 어디론가 가더니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하!"
그걸 본 우리는 하도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들고 온 것은 수갑이었다. 이제는 아예 그냥 범죄자 취급을 하는구나.
우리 눈앞에 수갑을 흔들면서 뭐라고 뭐라고 스페인어로 말하길래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는 잠깐 눈이 돌아가서 경찰관 앞에 내 손목을 들이밀며 말했다.
"수갑 채우고 싶으면 채우세요."
"아니. 당신 말고 당신 남편말이에요."
"아니. 잡아가려면 나도 같이 잡아가라고요."
나와 경찰관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대치했다.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데 제대로 된 답변은커녕 수갑으로 위협하다니. 감정이 격해졌다.
수갑을 들고 있던 경찰관은 이대론 안 되겠는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에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대충 '여기 한국인 한 명, 모로코인 한 명이 지금 소란스러우니 지원 좀 와달라' 같았다. 곧 몇 명의 직원들과 다른 경찰관들이 추가로 와서 우릴 둘러쌌다.
우리는 '대사관에 연락하겠다', '상관을 불러달라', '원활한 대화를 위해 영어로 소통 가능한 직원을 보내달라' 등등을 얘기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역시나 '그저 기다려라'였다. 이건 무슨 로봇도 아니고. 게다가 나중엔 나를 끌어내서 남편과 분리시키려고도 했다.

이 상황에 질려버린 우리는 파나마를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 파나마 입국 안 하렵니다. 더 이상 관광할 생각 없고 경유도 하기 싫고요. 지금 바로 콜롬비아로 갈 거니까 여권만 돌려주세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아니 왜?
"아니 그러니까 안 들어간다고요. 지금 바로 여권 돌려주세요!"
입국을 포기하겠다는데도 서류 진위판별이 필요한 것인가? 정말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다른 직원이 왔다.
"진정하시고 먼저 들어보세요(우리 이야기는 듣지도 않아 놓고). 서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동명이인이 있었어요. 그래서 둘 중에 누가 불법입국을 시도하는지를 확인해야 해서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그분 말에 따르면 남편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우리와 같은 시간에 입국을 하였고, 그렇다면 둘 중 한 사람은 불법입국이니 그를 확인코자 했다는 것이다.
"... 좋습니다.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그건 아직 모릅니다."
아. 또 이러시네.
"솔직히 말해서 저희는 파나마에 입국할 생각이 더는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고요. 그래도 서류 확인을 하셔야겠다면 한두 시간 안에 해결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한두 시간으로 합의(?)를 보고 우리는 다시 격리되었다.

의자에 앉아서 우리끼리 얘기했다.
"불법입국자가 있어서 확인한다고? 난 그 말 못 믿겠는데."
"풉 나도."
"그렇지? 아니 이상하잖아. 여보 이름이 결코 흔한 이름이 아닌데(아주 드문 이름이다. 여태껏 같은 이름인 사람을 한 번도 만나거나 들은 적도 없다). 모로코 국적의, 똑같은 이름의, 그것도 같은 시간대에, 그것도 파나마에! 딱 맞춰 들어온 사람이 있겠냐고."
"내 말이 그 말이야."
"맞지? 뭐 혹여 국적이 다르다고 치자. 그것도 말이 안 돼. 국적이 다르면 둘이 그냥 동명이인이지 둘 중 누군가가 불법입국했다고 의심할 게 뭐가 있어. 그리고 다른 어느 국가에도 여보랑 똑같은 이름인 사람 진짜 드물걸. 그것도 오늘 파나마에 입국한 사람은 더더욱 없지. 아무리 우연이 겹쳐도 말이 안 돼. 그냥 핑계 대는 거 같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욱 괘씸해졌다. 특히 아까 수갑 채우려던 사람 누구더라. 공항에 민원 넣게 이름이라도 외워둘걸.


그렇게 한 십여분을 있었나. 놀랍게도 아까 그 영어를 하던 직원분이 남편의 여권과 외국인 등록증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끝났습니다. 이제 나오셔도 돼요. 나가셔서 즐거운 여행 하세요."
뭐야. 이렇게 빨리 끝날걸 24시간 기다리네 어쩌네 했던 건가. 만약 우리가 그저 조용히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도 과연 몇 분 안에 여권을 돌려주며 즐거운 여행을 빌어주었을까.


격리 공간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피곤에 절어 의자에 쭈그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저분들은 어떤 문제가 있어 여기에 갇힌 걸까. 아마도 비자 문제로 파나마 입국도 안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운 분들인 것 같았다. 안타까우면서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과자 두 봉지가 나왔다. 아까 12시간째 식사를 못했다던 두 남자분들에게 드릴까 하다가, 아빠와 함께 앉아있는 어린아이가 눈에 들어와 아버님께 과자를 드렸다.
아버님은 미소를 지으며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하셨다. 왠지 내가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렇게 비행기 착륙 후 두 시간 만에 공항을 나오면서 우리는 바깥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후우-! 드디어 나왔네."
뭐 한 것도 없는데 공항에서 이미 진을 다 뺐다. 이럴 거였으면 진짜 그냥 콜롬비아 직항으로 가는 거였는데. 에잇.
그렇게 조금 후회를 하며 터벅터벅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길가에 웬 도시락들이 쌓여 있었다. 젊은 여성분이 공항 앞에서 아침식사용 도시락을 판매하고 계셨다.
밥 때도 되었겠다, 말다툼을 하느라 배도 더욱 주렸겠다. 우리는 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얼마예요?"
"치킨은 3달러, 새우는 4달러예요."
인상 좋은 판매자분은 직접 도시락을 열어 보여주셨다. 와우. 비주얼은 물론 냄새까지 장난 아니었다. 게다가 저렴한 가격까지!
"우와 맛있겠당. 치킨 하나, 새우 하나 주세요!"

그렇게 우리는 앉아서 도시락을 까먹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너무너무 맛있었다.
"으으 정말 최악의 입국 심사였어."
"그니깐. UK가 뭐냐는 말은 진짜 명언이다. 내가 오늘 당장 저 자리 취직해도 저거보단 잘하겠다."
"크큭 그러게. 아 근데 너무 맛있네 이 새우. 이거 먹으려고 입국심사 두 시간 걸렸나 보다. 하하."


웃지 못할 좌충우돌 파나마 입국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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