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다는 멕시코 유카탄 주의 주도이다. 원주민인 마야인의 문화, 인종, 언어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메리다에서 우리가 함께 지낼 카우치서핑 호스트인 '앙헬' 역시 마야어를 조금 할줄 안다고 했다. 그가 들려준 '유카탄'이라는 지역 명칭의 유래는 아주 뜻밖이면서 흥미로웠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마야인들의 땅인 이곳에 왔을 때 '이곳의 지명이 뭐냐'고 묻자 원주민들이 '유카탄'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사실 '유카탄'은 마야어로 '뭐라고?'라는 뜻으로 마야인들은 스페인어로 물어오는 침략자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유카탄?(뭐라고요?)'라고 되물었던 것일 뿐이나, 이를 본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받아들인 스페인 사람들이 이 땅을 유카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기야, 원주민들과 소통을 한다거나 그들에 대해 배우러 온 것이 아닌 그저 훔치고 갈아엎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었으니, 땅 이름을 '뭐라고'라 부르든 뉘집 강아지 이름으로 부르든 그들이 알게 뭐였겠는가 싶다.
멕시코인 앙헬은 프랑스인 아내 '데보라'와 결혼하여 메리다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우리 부부와 나이도 비슷하고 국제부부라는 점도 같아서 나눌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많았다. 두 부부 모두 걷는 걸 좋아하기도 해서 첫날에는 넷이서 밤산책을 나갔다.
날씨가 선선하여 오래 걸어도 쾌적했다. 앙헬과 데보라네 집에서부터 한 30분을 걸으니 메리다 중심 거리가 나왔다. 중앙에는 멕시코의 역사를 돌에 빙 둘러 조각한 큰 기념비 Manumento de la patria가 서 있다. 마야부족의 문양들로 장식된 이 기념비에는 멕시코의 모든 도시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들이 아닌 길고 생소한 단어들이다. 현재의 것이 아닌 식민지배 전 본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Manumento de la patria
메리다 광장에 있는 산 일데폰소 대성당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들 중 하나이다. 지금은 성당이 서 있지만, 과거의 메리다에는 원주민들이 만든 무려 다섯개의 피라미드들이 서 있었다. 그 때문에 과거 메리다는 '이쉬칸 지호(Ichkan ziho)', 마야어로 다섯개의 피라미드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랬던 피라미드는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부서지게 된다. 그렇게 해체된 피라미드가 바로 지금의 산 일데폰소 대성당을 이루고 있는 저 돌들이다. 공들여 지은 그들의 유산이 무너져내리는 걸 보았을 때, 그 잔해로 세워지는 바다 건너온 낯선 종교의 신전을 보았을 때 마야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침략자들이 믿는다는 그 신에 대한 믿음을 강요당했을 때, 마야인들의 눈에도 그 신은 성화에서처럼 성스러워 보였을까? 아니면 그저 또 다른 악마에 불과하게 느껴졌을까?
산 일데폰소 대성당
당시 스페인 침략자 가문의 집이었던 건물.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고대 도시인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 지어진 시기와 지은이 모두 미상인 불가사의의 유적이다. 메리다의 다섯 피라미드도 지금껏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을 터였다.
메리다에는 재미 있는 의자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서로 비스듬히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모양으로 설계된 이 의자는 어느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아이가 만나는 사람이 생겨 그 남자와 밖에 앉아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 벤치에 앉으면 딸이 데이트 중인 남자와 이야기를 하면서 스킨십을 하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시선은 마주 보면서도 신체 접촉은 줄일 수 있는 의자를 고안하여 만든 것이 바로 이 의자라고 한다.
앙헬이 사진을 찍어줄테니 나와 남편에게 의자에 앉아보라고 했다.
"자~ 뽀뽀 한번 하면서 찍어볼까?"
앙헬의 개구진 말에 우리는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냥 찍어달라고 했다. 의자를 고안한 사람의 의도에 맞게 과도한 스킨십은 자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뽀뽀는 좀 부끄러웠다.)
메리다의 의자
다음날에는 허리케인 경보가 내렸다. 미국 남부와 멕시코, 몇몇 캐리비안 섬국가들까지 영향권에 드는 커다란 허리케인이었다. 우린 비바람을 피해 집에만 있어야 했지만 오히려 얘기도 하고 요리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앙헬은 아침으로 달콤하고 고소한 타코스를 만들어 주었고, 남편은 점심으로 모로코식 양념을 한 채소찜을 요리했다.
앙헬의 타코스
남편의 모로코 요리
저녁에는 영화 '플레이밍 핫'을 보았다. 과자공장의 가난한 노동자였던 멕시코계 미국인 리차드 몬타녜스가 치토스에 매운 양념을 묻혀 판매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면서 공장도 살리고 승진하여 간부가 된다는, 실화 바탕의 성공 스토리였다.
영화가 끝나고는 모두 눈이 벌겋게 충혈될 때까지 졸음을 쫓아가며 수많은 종류의 보드게임을 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공원 어르신들이 하시는 걸 구경만 했던 '도미노'라는 게임도 앙헬과 데보라가 알려주어 직접 해볼 수 있었다.
우리가 집안에서 열심히 노는 동안 허리케인도 열심히 비를 뿌리고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더니 이튿날엔 잠잠해졌다. 이대로 바람이 가라앉지 않으면 메리다를 떠나는 날을 조정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계획을 바꾸진 않아도 되었다. 하마터면 숙소에 틀어박혀 날씨만 원망할 뻔했는데, 카우치서핑 덕에 궂은 날씨에도 메리다에서 좋은 추억을 남긴 채 떠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영화 플레이밍 핫의 그 과자. 맛이 궁금하여 사 보았다. 기분 좋게 톡 쏘는 매운맛에 혀가 아릿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