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 두샨베
아제르바이잔에서 이란 비자를 기다리다 지쳐 결국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로 날아왔다.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 깊은 밤이었지만 우리의 카우치서핑 호스트 '자말'은 말똥하게 깨어있었다. 언제든지 와도 문을 열어줄테니 걱정 말라는 문자를 받았다. 너무 미안한데. 우리 때문에 일부러 잠 안 자고 기다리는 거 아닌가 걱정하면서 서둘러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자말의 집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님은 멋진 소비에트 모자를 쓰고 운전을 하셨다. 여담이지만, 기사님은 멋진 모자와는 다르게 앞뒤가 다른 성품으로, 우릴 태울 땐 2달러를 부르시고선 내릴 때가 되니 5달러를 요구하셨다. 택시 번호판을 찍어 경찰을 부르겠다 엄포를 놓으니 그때서야 2달러를 받고 유유히 사라지셨다..
아무튼 그렇게 자말의 집에 도착했는데 자말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 대여섯의 젊은이들이 모여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새벽 3시를 향해 가고 있는데 야밤에 보드게임이라니. 이 친구들.. 장난 아니구나! 우리는 게임은 할 줄 몰랐지만 게임 진행 중간중간 그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자기소개도 하고 어떻게 두샨베 오게 되었는지 등등. 친구들 중에는 타지키스탄 사람인 호쉬바트, 국제기구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독일인 친구 마리우스, 파키스탄에서 사업차 일하러 온 자말의 룸메이트 야신도 있었다. '사디크'라는 이름의 한 친구는 이란에서 왔고, 우리처럼 여러 나라를 여행중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붑커! 카우치서핑에서 우리 연락했잖아."
알고보니 사디크는 몇주 전에 이미 카우치서핑 사이트에서 남편과 우연히 알게 되어 연락처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우리도 사디크도 이 날, 이 시간에, 그것도 자말의 집에서 서로를 우연히 만나게 될 거라고는 당연하게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하늘이 이끌어준 것 같아 더욱 특별했던 첫만남이었다.
"이렇게도 만나는구나.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동이 트기 직전이 되어서야 친구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고 우리도 자말의 집에서 이부자리를 폈다.
자말은 이 동네에서 유명인사였다. 온화한 성품에 손님 맞이하기를 매일같이 즐기는 그였기에, 자말의 집은 항상 친구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비록 고향은 파키스탄이지만 타지키스탄에 와 살면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고 모임을 주도하며 두샨베에서 가장 많은 리뷰를 보유한 카우치서퍼 중 한명이었다. 지인들 한명한명을 살뜰하게 챙기는 그의 성격에 모두가 입을 모아 '자말의 집은 곧 우리의 집'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덕에 나와 남편도 자말의 집에 초대되어 오는 친구들과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자말네 집에서 지내는 내내 아침마다 자말이 끓여주었던 카락티의 맛을 잊지 못한다. 카락티는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마시는 밀크티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향신료의 풍미가 강렬하여 한번 마시면 한잔 더 마시고 싶어지는 차였다. 타지키스탄 이후 파키스탄에서도 카락티를 매일 마셨지만 자말이 끓여준 차보다 맛있지는 않았다.
자말은 카락티 뿐 아니라 아침밥도 만들어 주고, 때론 시간이 맞으면 오후의 밥상까지도 손수 차려주기도 했다. 그런 자말에게 고마운 마음에 우리도 밖에서 간식거리를 한번씩 사와 자말과 나눠 먹곤 했다. 그중에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먹는 음식인 '삼부사'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바삭하고 살짝 기름진 빵 안에 잘게 썬 고기, 야채, 치즈 등을 넣어 화로에 구워낸 손바닥만한 먹거리였다. 그 모양은 만두꼴, 세모꼴, 네모꼴 등 다양하지만 물방울 모양으로 만드는 경우가 가장 많아 보인다. 이란에서 온 사디크의 말로는, 이란에도 삼부사가 있는데 그 모양이 꼭 물방울 모양으로 짜낸 치약 같다고 해서 '치약 모양 삼부~사'하는 가사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단순하고 독특한 리듬의 노래에 중독되어 우리는 사디크와 다니는 동안 걸핏하면 '치약 모양 삼부~사!' 하고 흥얼거리곤 했다.
화로에 삼부사를 구울 땐 반죽에 물을 묻혀 화로 안에 찰싹 붙여서 굽는데 그 모습이 색다르고 재미있어 영상에 담아 보았다.
독일에서 온 마리우스는 타지키스탄에 몇달간 지내며 국제기구 인턴십을 수료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마리우스가 오페라를 보러갈 건데 같이 가겠냐고 하여 Ayni 오페라 하우스로 따라갔다. 사디크, 호쉬바트, 그리고 마리우스와 함께 일하는 한국인 친구 S도 함께였다. 마리우스는 독일 뿐 아니라 여러 나라들의 오페라 극장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클래식 음악과 공연에 관심이 많고 관련 지식도 해박한 친구였다. 오늘의 오페라는 비교적 대중에게 친숙한 노래들도 연주되는 '박쥐'여서 마리우스 뿐 아니라 오페라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도 금세 빠져들어 관람할 수 있었다. 현지말을 알아듣지 못해 중간중간 깨알같은 개그 요소들을 알아듣지 못했던 건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오늘은 자말과 그의 친구들과 같이 스키장에 가기로 한 날이다. 나나 남편이나 스키장은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는 생초보였지만,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스키장 방문시 내야 하는 돈의 반값도 안되는 가격에 스키를 탈 수 있다기에 이 기회를 잡기로 했다.
스키장은 두샨베 시내에서 미니버스로 1시간 정도 달려서 도착한다. 스키장에 들어서면 다른 것보다도 산의 전망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설경만 바라보더라도 이미 입장료값은 충분히 했다 여겨질 정도의 장관이다.
스키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대체 이 철판 같은 걸 끌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턱이 없었다. 처음엔 스키를 신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일어서기 조차도 힘들어 쩔쩔맸다. 남편은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어서인지 금방 터득해서 나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속도를 높이려면 몸을 일자로 세우고, 줄이려면 스키의 앞부리를 A자형으로 모으면서 발바닥 안쪽에 힘을 실으라는데. 따라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내가 타기만 하면 오리궁둥이마냥 엉거주춤만 할뿐 속도는 전혀 조절되지 않았다. 나중엔 그냥 넘어지면 넘어지는대로 눈속을 구르면 구르는대로 그러려니 했다.. 잘 못타면 뭐 어떤가. 우리끼리 재미있으면 됐지.
스키 고수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산 위에서부터 스키를 타고 장거리를 내려오기도 한다. 꼭대기에서 보는 경치가 퍽 아름답기 때문에 꼭 스키를 타려고가 아니라 산의 전경을 보기 위해서라도 케이블카는 타는 것을 추천한다.
스키장에 다녀온 뒤로 우린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제 모였다 하면 한 식구처럼 자연스레 요리를 해먹고 보드게임을 하고 때론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앉아 있거나 낮잠을 자기도 했다.
한번은 사디크가 이란에서 먹는다는 음식을 해줬는데 요리의 이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야채만 들어갔는데도 그 맛이 참 좋았다. 양파, 가지, 요거트 등 들어간 재료가 많지도 않은데 풍부한 맛이 나서 빵에 얹어 먹기 괜찮았다. 사디크는 아내가 만들면 더 맛있다며 자랑스레 말했다.
"네가 만든 것도 맛있는데 아내분이 하신 건 그럼 얼마나 더 맛있는 거야? 그거 먹으러 이란 꼭 가야겠는걸."
이란 비자를 받으면 사디크의 집에 가장 먼저 찾아가야겠다.
눈이 소복이 쌓여 유난히 춥던 하루는 남편이 모로코 수프의 하나인 '하레라'를 요리했다. 하레라는 주로 라마단 금식중에 먹는 영양만점 요리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로코 요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자리에 모인 모두가 입을 모아 하레라의 맛을 칭찬했다. 한국인 친구 S는 무려 네 그릇이나 비웠다.
자말의 집에 모이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중 드물게 타지키스탄 토박이 친구들도 있었다. 오늘은 타지키스탄인 친구 호쉬바트가 타지크 전통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음식점에 우리를 데려갔다. 우리는 '오쉬', '플라브'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식 요리를 시켰다. 고기와 야채와 함께 볶아낸 밥이었는데, 동아시아에서 먹던 볶음밥에 비하면 고기 기름에 코팅된 밥알이 반짝일 정도로 기름진 편이었다. 이 느끼함을 잡아줄 피클과 요거트를 밑반찬으로 같이 먹으면 질리지 않고 더욱 맛있게 오쉬와 플라브를 즐길 수 있다.
하루는 고맙게도 한국인 친구 S가 한식당에 우릴 초대해주었다. 비빔밥, 김밥, 닭강정, 콩국수, 떡볶이, 계란말이, 김치.. 한식이 너무나도 그리웠던 차에 한상 가득 차려진 밥상을 정말 정신 없이 먹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먹는 고국의 맛에 감격스럽기마저 했다. 깍두기 하나까지도 콧소리를 내면서 음미하며 먹었다. S의 배려 덕분에 밥심을 제대로 충전했던 날이었다.
사실 두샨베는 볼거리가 그다지 많은 도시라고는 못하겠다. 그런데도 자말과 함께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하루 지루할 틈이 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어느덧 두샨베의 친구들과 보내는 마지막 밤이 다가왔다. 오늘은 마지막인만큼 자말의 집에 초대가수까지 불러 놀기로 했다. 힘들게 모신 초대가수, '호쉬바트'를 소개한다.
호쉬바트는 기타 연주와 노래 실력이 뛰어나고 유튜브 채널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평소 진지한 구석 없이 장난만 치던 그가 기타를 잡자 180도 돌변했다. 빠른 템포의 신나는 곡부터 로맨틱한 선율까지 악보를 보지 않고도 뚝딱 연주해냈다. 우리도 질세라 그 연주에 맞춰 춤 한판을 벌였다. 그렇게 오늘도 자말의 집은 밤새 따뜻한 불빛과 왁자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행자들은 보통 파미르고원에 갈 목적으로 타지키스탄을 찾는다. 그런데 지금은 한겨울이라 고원에 가도 온통 눈으로 뒤덮여 차가 움직이기도 어렵고 등산은 당연히 힘들다.
무엇보다 안전의 문제도 있었다. 최근 타지키스탄에는 이슬람을 이용하여 나라를 장악하려는 군세력이 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타지크 정부는 이슬람이 국교임에도 이슬람 종교활동을 금기시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타지키스탄에선 무슬림 복장을 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고, 남성들도 무슬림 식으로 수염을 기르던 걸 대부분 이발을 해버렸으며, 모스크에선 아단마저 울리지 않는다.
문제는 이 이슬람주의 반군들이 파미르고원에 자리를 잡고 테러를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 테러의 손길은 현지인이고 여행객이고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여행객들도 타깃으로 삼아 타지키스탄 정부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려고 하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정말 파미르고원 여행 중 총에 맞을 수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파미르고원은 가지 않았고, 대신 타지키스탄 북부의 '후잔트'라는 도시에 잠시 머물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국경을 넘어가기로 했다.
"두샨베에서 후잔트로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워. 경치를 보는 재미가 있을 거야."
마리우스도 예전에 후잔트에 가봤는데 그 길이 아주 예뻤다며 추천했다.
우린 아침 일찍 두샨베에서 후잔트로 가는 쉐어택시를 타고 길고 긴 산길을 달렸다. 자말의 집에서 만난 인연들, 그 우연한 만남이 선물해준 행복하고 값진 시간들로 기억의 지층은 한층 더 두터워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 옆에는 한명의 든든한 동행도 생겼다. 자말 집에서 같이 지냈던 이란 청년 사디크다.
이란 비자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비자대행사에서도 왜 늦어지는지, 얼마나 더 늦어질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만 했다. 근데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간의 여정에서 차곡히 쌓인 친구들과의 추억이 더 소중했기에, 비자는 어느새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잊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