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 바쿠
간혹 그런 날이 있다. 하루의 시작부터 아무 이유 없이 이상하게 뭔가 안 풀리는. 바쿠에서의 첫날이 그랬다.
공항을 떠나 바쿠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겉옷이 척척하도록 젖은 것.
예약한 호스텔의 위치를 직원이 엉뚱한 위치로 알려 주어 5분이면 갈 거리를 30분 넘게 헤맨 것.
호스텔에서 추천받은 자그마한 식당을 찾으며 여러 행인들에게 길을 물었는데 제대로 된 방향을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저녁 7시 반에 들어간 카페가 8시에 문을 닫는 바람에 얼마 앉아 있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던 것.
이렇게 소소하지만 거슬리는 일들이 반복되는 날에는 평소보다 행동거지에 빈틈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간과했다간 작은 틈을 타고 불쑥 더 큰 불운이 닥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무심코 현관에 둔 신발이 밤새 사라지는 따위의 불운이..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을 때 나는 그만 호스텔 현관의 신발장에서 내 신발만 쏙 사라진 것을 발견하였다. 작년 생일에 남편이 선물해 준 등산화였다.
"정말 이런 일이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거든요. 저희 호스텔 평소엔 정말 안전합니다. 어제는 하필..! 후우..진짜.."
호스텔 사장님은 순간 분노가 서린 눈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젯밤 호스텔을 지킨 직원은 사장님의 친척인데 새벽에 체크아웃하는 손님들이 떠나고 난 뒤 문단속을 하지 않고 잠에 들어 버렸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장님의 눈은 도끼눈으로 변했다.
사실 자초지종은 대충 알고 있었다. 도난 소식에 놀란 사장님이 호스텔로 달려오기 전 이미 cctv로 모든 정황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영상에서는 새벽 3시경 한 여성이 현관문을 열고 호스텔 안쪽 객실까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마치 자기 집인 양 걸음걸이도 당당한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맨 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돈 될만한 물건은 없는지 이곳저곳 뒤져보던 여성은 나가기 전 신발장을 한번 훑고 밖으로 사라졌다. 현관 바로 앞의 소파에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직원은 어찌나 깊이 자는지 도둑이 홀연히 떠날 때까지 미동도 없었다. 그날 밤새 호스텔은 문이 열린 채로 지키는 이 하나 없이 방치된 셈이었다.
사장님은 잔뜩 우울한 표정으로 연신 사과만 하실 뿐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원래는 제가 호스텔을 항상 지키면서 관리했었는데 최근에 경황이 없어 친척에게 맡기는 바람에.. 사실 근래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다니느라 호스텔을 비울 수밖에 없었어요. 신발을 잃어버리신 건 저희 불찰로 일어난 일이니 얼마든지 배상해 드릴게요. 필요하시면 며칠이고 무료로 호스텔에 머무셔도 돼요. 신발값을 돈으로 달라고 하시면 제가 다 드릴게요.."
사실 따지고 보면 사장님도 도난 사건의 피해자였다. 그날 호스텔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직원에게는 화가 났던 게 사실이지만 사장님은 오히려 안쓰러웠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들으니 괜히 우리까지 미안해졌다.
우린 호스텔에 무료로 숙박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사장님은 cctv 영상을 근거로 경찰에 신고를 하셨다. 범인을 잡았다고 연락이 올 때까지 우린 일단 바쿠에 머물기로 했다. 어차피 이란 관광비자를 신청해 둔 상태라 비자가 나올 때까지 바쿠에서 며칠 지내야 하기도 했다. 당장 신을 신발은 그날 호스텔을 지킨(?) 직원이 사비로 구매해 주었다.
새 신발의 딱딱한 바닥은 한참 동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내 신발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발에 폭신하게 꼭 맞기도 했고 등산화라 튼튼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남편이 한국에 와 힘들게 일해 번 돈으로 사준 거라 나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범인 잡혀서 경찰서에서 만나게 되면 꿀밤 한 대만 먹여도 되나?"
"하하 글쎄. 일단 잡혀야 말이지."
"그렇지. 잡을 수 있을까? 신발 어디에 팔아먹었으면 어떡하지?"
실제로 우린 그날부로 행인들이 신고 있는 신발이나 구제판매점의 신발들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혹시 팔려가서 누가 신고 있거나 어디에 진열돼 있진 않을까 싶어서.
그날 자기 전에 신발을 방 안에 들여만 놓고 잤더라면 도둑맞진 않았을 텐데. 때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호스텔의 보안을 너무 쉽게 믿어버린 나 자신을 탓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과연 우린 신발을 되찾을 수 있을까?
며칠 뒤. 경찰서로부터 호스텔 사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범인이 잡혔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범인 잡았대요! 여기 보세요. cctv 속의 여자 맞나요?"
사장님은 경찰서에서 보내준 영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경찰이 잡힌 범인에게 범행 관련하여 신문을 하는 영상이었다. 영상 속의 범인은 그날 cctv에 찍힌 여성과 동일했다.
"네, 맞아요. 근데 뭐라고 하는 거죠?"
영상 속 경찰과 범인의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 사장님께 물었다.
"경찰이 호스텔에서 신발을 훔쳤는지 묻고 있어요. 범인이 그렇다고 하네요. 어디에 두었냐고 물어보니까 범인은... 팔았다고 대답하고요. 얼마에 팔았는지 어디에 팔았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네요.."
잡힌 범인은 아제르바이잔 사람으로 상습 절도범이라고 했다. 그날 새벽에는 우리 호스텔뿐 아니라 동네의 다른 집들도 여럿 털렸다고 한다. 영상 속의 반쯤 풀려있는 눈과 어눌한 말투에서 마약에도 손을 대는 사람이라는 게 여실히 보였다. 약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훔친 물건들을 전부 어딘가로 팔아넘긴 것이다. 이제 신발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 나의 신발을 보내줄 때가 되었다. 짧았지만 함께 많은 추억을 쌓았던 시간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바닥도 별로 닳지 않았고 아직 깨끗하니까 어딘가에서 제 남은 역할을 다하길 바랄 뿐이다.
앞일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절도, 강도, 마약 등의 범죄가 판을 치고 우범지역에선 까딱하다 목숨도 도둑맞을지 모르는 남미. 그곳에서는 정작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가, 전혀 걱정하지 않고 온 아제르바이잔에서 첫날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우리에게 벌어진 사건이 그저 도난에 그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 하나 상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회로를 돌리려 노력해도 바쿠라는 도시의 첫인상으로 '도둑맞은 신발'만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 아제르바이잔 별로야."
"왜?"
"그냥 별로야. 재미없어. 신발만 자꾸 생각나고."
그렇게 나에게 아제르바이잔은 '별로'이기만 한 나라가 되어 버리는 줄 알았다. 카우치서핑에서 한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