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아라비아- 메디나
이슬람 제 2의 성지, 메디나에 왔다. 메디나는 메카보다 조금 쌀쌀하면서 낮에는 덜 덥고 쾌적한 날씨였다. 메카는 이슬람 제 1의 성지이지만 알 하람의 까바를 보기 위해 가는 곳이지, 도시의 외관이 인상에 크게 남진 않았다. 그에 비해 메디나는 평범한 거리에서도 역사와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조금은 달랐다. 메카에서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이슬람의 복장을 엄격히 지켜 입었고, 특히 여성의 경우 히잡을 쓰지 않은 사람은 정말이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메디나에 와서는 다른 나라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복장이 자유롭고, 보다 현대적이며 다양한 스타일에, 여성들도 소매가 짧은 옷을 입거나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이 비교적 자주 보였다.
메카에 까바가 있다면 메디나에는 무함마드 성인의 묘가 안치된 '알 마스지드 안 나바위 (예언자의 모스크)'가 있다. 무함마드 성인은 메디나에 와서 모스크를 짓고, 그 바로 옆에 집을 짓고서 살다가, 자택 안에 있던 부인 아이샤의 거처에서 생을 마감하여 그 자리에 묘가 세워졌다. 후에 여러 왕조를 지나며 모스크는 증축을 거듭하였고, 무함마드의 묘는 모스크의 내부로 합쳐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언자의 모스크이다.
규모도 대단하지만 자외선을 막아주는 야외 차양과 일조량 조절이 가능하도록 자동으로 여닫히는 돔 등, 유구한 역사와 미관 뿐 아니라 실용성과 편리성까지 갖춘 모스크였다.
예언자의 모스크 안에 있는 무함마드 성인의 묘를 보려면 반드시 미리 온라인 예약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걸 모르고 갔다가 처음엔 입장을 거절당했다. 모스크에서 나오는 길에 예약 웹사이트를 확인해 보니 가까운 시간대에는 남은 자리가 없어도 운 좋게 내일 새벽 시간대에는 예약이 가능했다. 그렇게 네 명의 관람을 예약해 두고 입장 시간을 기다리며 메디나를 돌아다녔다.
메디나에도 메카에서처럼 기념품 시장이 있었다. 메카에서 잊어버리고 사지 못한 물건들이 몇 가지 있어서 이곳 메디나 시장에서 구입을 하기로 했다.
구경하다가 어느 옷집에서 아바야(여성 드레스의 한 종류)를 구매하던 중 니캅(여성용 얼굴을 가리는 천)을 발견했다. 볼 때마다 한번 써보고 싶었는데 이 기회에 살짝 착용해 보았다. 거울을 보니 눈만 삐죽 나와 있어 어색하다. 자외선 차단으론 꽤 괜찮아 보인다.
"어때?" 남편이 물었다.
"사우디 부자의 두 번째 부인같이 생겼어."
내 대답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남편이 서넛의 부인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부인들이 니캅을 쓰고 있는 걸 본 것이 기억나 던진 농담이었다.
메디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쿠바 모스크'라고 할 수 있다. 쿠바 모스크는 무함마드 성인이 메디나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세운 모스크이자 역사상 최초의 모스크로도 알려졌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한 번의 우므라를 한 것으로 칠 만큼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진다.
"아이고~ 우므라 한다고 몇 시간을 걸었는데 여기 와서 기도 한 번이면 우므라 한 번이나 마찬가지라니이이."
우리의 장난스러운 말에 엄마는 또 배를 잡고 웃으신다.
별 거 아닌 거에도 웃고 떠들면서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곧 무함마드 성인의 묘에 방문할 시간이 머지않았는데 아까부터 몸이 조금 이상하다. 낮에는 목구멍이 약간 칼칼한 것 빼곤 별 문제없었는데 한 시간쯤 전부턴 급속도로 피곤이 몰려오면서 몸이 으슬으슬 추워오기 시작했다. 따끈한 차를 사서 마셔도, 숙소에 들어가 잠깐 몸을 뉘어도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몸은 단숨에 불덩이가 되었다. 난 결국 백기를 들고 숙소에서 남편과 같이 쉬기로 결정했다. 시어머니는 오마르와 같이 무함마드의 묘를 보러 가셨다. 묘 같은 건 안 봐도 아무 상관 없었지만 나를 돌보느라고 남편이 엄마랑 같이 가지 못하게 된 상황이 되어 너무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해열제를 먹고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초췌한 얼굴의 오마르가 보였다. 어제 묘에 다녀온 뒤 오마르도 열이 나기 시작했고 밤새 끙끙 앓았다고 했다.
제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 나와 오마르 둘 다 퀭한 얼굴에 꽉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메디나 여행의 마지막 날에 아파서 다행이다. 메카에서 아팠더라면 귀한 시간을 통째로 날릴 뻔 했는데, 지금은 좀 아파도 억울하지 않다. 열심히 쌓은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
성지순례 여행을 마치고 모로코에 잘 도착하신 시어머니께서는 공항에 마중나온 가족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면서 금의환항하셨다고 한다.
이슬람에선 메카에 다녀온 사람을 '하지(남성)' 혹은 '하쟈(여성)'라고 부른다. 이는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말이기도 하다. 시어머니는 성지순례 전에도 '하쟈'라고 불리기에 흠이 없는 분이셨지만, 이제 메카에 다녀오신 뒤로 진정한 '하쟈'가 되셨다.
성지에 다녀오고 말고가 중요하다기 보다도, 시어머니께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될 이 시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다는 것이 가장 기쁘다.
무엇보다 이 여행을 온 마음으로 응원하고 함께 기뻐해 준 우리 가족, 시댁 가족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시어머니의 기도대로 온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바라는 모든 바를 이룰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