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길, 다시 만날 그날을 그리며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그 마무리

by 소울메이트

등산을 가면 힘든 순간에 떠오르는 엄마의 말씀이 있었다. 산을 탈 때는 지금 눈앞에 놓인 한걸음만 보고 가라는.

먼 길을 갈 때 앞으로의 기나긴 여정을 생각하면 '언제 저기까지 가나'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나는 지금 이 한걸음에만 집중한다' 하고 가면 어느새 목적지가 눈에 보이는 때가 온다. 그러면 천리길도 한걸음이 된다.

산은 밖에서 보면 그 위풍당당한 기세가 한없이 높고 오를 엄두가 나지 않다가도, 심스레 그 언저리에 발을 담그고 박또박 작은 보폭으로 걸어 들어가면 그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게 된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고 하산을 하고 나서 걸어온 길을 찬찬히 되돌아보면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한편이 생긴다. 인생도 이처럼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올라야 하는 산은 왜 다른 산들보다 더 크고 험하냐고 불평하지 말걸. 누군가는 돌산을 오를 때 나는 도 닦여 있고 시원한 물도 흐르는 산을 탔으면서. 누군가는 맨발로 산을 오를 때 나는 갈아 신을 신도 있었으면서. 한걸음도 온전히 걷지 않으면서 정상이 먼 것을 탓하기만 했다. 타기 시작한 산도 마무리하지 못하고서 왜 다른 산을 못 타게 하냐고 떼를 썼다.

그래서 더 한발 한발 성실하게 산을 탄다. 그동안은 이렇게 못 살았으니 앞으로의 인생은 지금 타는 산처럼 살내고 싶다.

안나푸르나


ABC에는 2011년 안나푸르나를 오르다 실종되신 박영석 대장님의 동상이 서 있다.


눈 내린 ABC


해가 조금 더 떠오르자 눈 쌓인 ABC는 완전한 순백색으로 강렬히 빛난다. 안나푸르나를 뒤로 하고 내려가던 등산객들은 그 모습에 경탄하며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우리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멈춰서 다시 한번 카메라를 들었다. 이 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추위도 잊게 만드는 절경



또 만나자 ABC


내려가는 길은 오르는 것에 비하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더 조심했다. 쉽다고 자만하고 방심할 때에 꼭 일이 터지더라. 산은 원래 내리막이 더 위험하다. 방방 뛰어내려 가다가는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카라치에서 다친 꼬리뼈가 아직도 한 번씩 욱신거렸다. 또 넘어져 같은 통증을 겪고 싶진 않았다.


올라올 때 가장 무서웠던 바로 그 구간을 다시 지난다.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인도네시아 친구들을 내려갈 때 다시 만났다.


ABC 코스 하산길은 등산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아침 동틀 때부터 ABC에서 시작하여 내려오면 당일에 끝마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려오는 길에도 올라갈 때 못 보았던 또 다른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우리는 시누와까지 가서 자기로 하고 여유롭게 내려갔다.

커피를 마시며 쉬는데 옆의 롯지에 헬기가 도착하여 갖은 생필품들을 내려놓고 몇몇의 사람들을 태워 다시 날아갔다.


시누와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엔 오랜만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오늘은 두세 시간만 더 내려가면 되기에 느긋하게 아침도 먹고 내려가는 길에 서로 장난도 더 많이 쳤다. 여기저기 해찰하고 떠들고 차도 한잔 하면서 소풍길처럼 내려왔다. 마음이 여유로우니 풍경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어깨에 짐을 가득 지고도 무거운 기색 하나 없이 걸으시는 아저씨


등산 스틱으로 아쟁을 켜는 남편


올라갈 땐 무당벌레 친구가 따라오더니, 내려올 때도 어떤 친구가 따라왔다. 이름이 뭐니?


커피 타임


흙탕물과 풀떼기로 요리 삼매경에 빠진 아이


평화로이 나부끼는 깃발


아기를 키우는 어느 집의 정겨운 빨랫줄


강아지와 꽃을 좋아하는 Su


등산 첫날이 기억난다. 지누단다의 출렁다리를 건너며 시작하려 했으나 엉뚱한 곳에서부터 출발했던 그날. 그때 보지 못해 아쉬웠던 출렁다리를 건너기 위해 오늘은 지누단다 마을 쪽으로 내려왔다. 다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굵고 튼튼한 철근을 꼬아 만든 다리이지만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공중에서 다리가 출렁이니 오금이 다 저렸다. 다리의 폭이 좁아서 나귀가 맞은편에서 올 때는 동시에 건너지 못하고 나귀가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리에 올라야 한다.



지누단다 출렁다리를 건너오면 지프차 여러 대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대에 올라 우린 포카라로 향했다. 맘씨 착한 Su는 맨 뒷자리에 앉는 불편함을 감수며 우리에게 중간 좌석을 양보했다. 등산길 내내 Su는 우리를 배려해 주었다. 남편의 무릎이 아플 때 등산스틱을 나눠준 것도, 내가 고산병으로 힘들 때 약을 준 것도 전부 고마웠다. 히말라야 덕분에 좋은 친구를 만났다.

마음이 넓었던 Su


늦은 오후가 되어 포카라에 내려왔다. Su도 우리도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각자 숙소에서 몸도 씻고 쉬다가 저녁에 만나 같이 밥 한 끼 하자고 했다. Su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페와 호수변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쉬었다. 잔잔한 물에 떠가는 나무배와 산책하는 사람들의 도란도란 얘기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자니, 지난 닷새 동안의 산행이 꿈처럼 느껴진다. 구름이 걷힌 자리에 '여기 줄곧 있었노라' 하고 우뚝 솟아 우릴 굽어보던 안나푸르나의 모습이 명하면서도 아득하게 떠오른다. 길고 아름다운 꿈을 꾼 것만 같던 시간이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때 전해져 오는 허벅지의 통증이 꿈을 꾼 아니었다고 알려준다.


호수 위에 붉은 점으로 찍힌 해


저녁이 되고 Su와 네팔친구 S를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고된 산행을 함께해 준 Su, 우리 모험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준 S, 모두에게 고맙다. 잊지 못할 추억의 벽돌 하나를 히말라야에서 쌓을 수 있어 감사하다. 쉽지 않은 길을 거쳐 안나푸르나라는 대자연을 마주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성취감에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 동시에 그 안나푸르나 역시 거대한 히말라야의 한 자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인간은 얼마나 사소한가를 한 번 깨달으며 끝없이 겸손해진다. 더 넓은 세상을 밟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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