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등산 3일 차.
이제 ABC까지 남은 마을들을 나열해 보면 도반->히말라야->데우랄리->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ABC 순이었다. 애초에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중간에 어느 마을에서 멈추어 가도 상관없었다. 그때, 우리가 ABC 산행을 시작하도록 이끌었던 그 네팔인 친구 S로부터 'ABC에서 숙박하는 것을 추천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안나푸르나봉의 풍경이 그토록 아름답다면서.
ABC에서 자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꽤 여러 가지 있었는데, 일단 너무 추울 것 같았고, 등산코스 맨 위에 있는 마을이라 롯지 숙박비용이 가장 비쌌고, 고도 4000m 넘는 곳에서 고산병을 무릅쓰며 굳이 자고 싶진 않기도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S가 말하길 ABC의 어느 롯지 사장이 본인의 친구이니 좀 싸게 재워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음 그래? 그렇다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오늘 까짓 거 가버리자! ABC까지."
그렇다. 사실 방값만 깎아준다면야.. 잘 때 추운 거나 고산병쯤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는 그저 핑계였다는 것이 이렇게 탄로 나고 만다.
그리하여 ABC까지 단숨에 오르는 것으로 어쩌다 계획이 변경되었다.
ABC 코스는 무난하다. 산에 오르기 전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간다 해도 무려 히말라야인데 잘 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없진 않았다. 베이스캠프까지만 가는 것이니 로프로 몸을 휘감고 깎아지른 암벽이나 폭풍 치는 설산을 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 위험하겠지?"
"낭떠러지 같은 건 없겠지?"
하면서 말이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막상 와보니 그런 걱정들은 무색해졌다.
그렇더라도 항시 안전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도중에 Risk Area라고 팻말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는 군데군데 눈도 쌓여있고 가파른 비탈을 건너가야 하는 구간도 있다. 발을 헛디디면 쭈우욱 눈밭을 미끄러져 저어기 계곡으로 떨어지게 생긴 곳도 있었다. 조심만 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곳을 지날 때에는 침이 저절로 꼴깍 삼켜졌다.
지금껏 해발 2000m부터 4000m까지 고산이라 부를 수 있는 여러 곳들을 다녀보았다. 두통과 흉부 답답함 정도의 가벼운 고산병 증세를 겪어본 경험도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그 정도로 약간의 불편함만 감수하면 무리 없이 해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다. 고산환경에 나름 단련된 몸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지독한 고산병이 찾아온 것이다.
해발 3700m MBC에 도착하자 나는 눈에 띄게 뒤쳐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증세가 희한했다. 두통이나 어지럼증보다는 몸 전체에 누가 그물이라도 씌운 것처럼 한발 한발을 떼기가 어렵고 근육에 극심한 피로가 몰려와 사지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눈발 섞인 바람이 불어 추위까지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길은 오르막이라고 할 것도 없이 평지에 가까웠는데도 그 미세한 경사마저 태산같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힘내. 이제 2km도 안 남았어!"
남편의 격려에 밭은 숨을 몰아쉬며 천근 바윗덩이 같은 발을 앞으로 옮겼다. 너무 힘들면 Su가 나누어 준 스틱에 잠시 지탱하여 숨을 골랐다. ABC 전 마지막 마을인 MBC는 저 뒤로 점점 멀어져 가는데,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MBC로 되돌아가서 쉬자고 할까? 하는 충동이 불쑥불쑥 들었다.
몸은 제발 쉬고 싶다고 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내일 아침 방문을 열면 눈앞에 펼쳐질 안나푸르나봉을 상상했다. 뒤는 돌아보지 말자. 이미 지나온 마을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도록 아예 멀리 떨어져 버리자. 나는 마음을 다잡아가며, 호흡을 가다듬어가며, 모래밭을 기어가는 거북이처럼 근근이 앞으로 나아갔다. 내딛는 한 걸음에만 집중하며 얼마간 그렇게 걷자 ABC와 MBC의 중간지점을 지나쳤다. 됐다. 이제 돌아가기엔 이미 걸어온 길이 아깝게 되었으니 선택지는 ABC 하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마지막 고비를 넘었다. 마침내 '나마스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라는 푯말이 보였을 때는 너무 지쳐 환호성도 나오지 않았다. '와아아!' 대신 "끄으응.." 하면서 베이스캠프 앞에 간신히 서서 어찌어찌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도착했다는 기쁨보다 얼른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에 들어가 쉬었다. ABC의 롯지에는 방에 난로가 없다. 최대한 옷을 껴입고 제공되는 이불로 몸을 꽁꽁 감싼 다음 옆자리의 남편과 껴안고 체온을 유지했다.
"방이 너무 추우면 식당으로 갈까? 거기는 난로가 있으니까 따뜻하잖아."
"응.. 근데 나 지금 너무 어지러워."
고산병이 점점 심해졌다. 이마가 달아오르고 두 눈은 터질 것처럼 아프고 머리는 어지럽다 못해 구역감까지 있었다. 침대에 누워 쉬려고 방에 있자니 너무 춥고, 난로를 쬐러 식당으로 가자니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일단 숨 쉬는 게 너무 힘들었다. 방금 막 달리고 온 것마냥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산증세로 인해 무서움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Su가 가져온 상비약 중 고산병약이 있어 그걸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얼른 잠이라도 들면 좋겠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쉽사리 잠도 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잡생각이 떠다녔고 90%는 걱정이었다. 비상시에 대비한 산소통 정도는 여기에도 있겠지? 없으려나? 그럼 증상이 계속 더 심해지면 어떡하지. 여차하면 헬기를 불러서 타고 내려가야 하나..
고맙게도 나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수십 번을 깨긴 했지만. 당시에 고산병에 더해 체기가 좀 있었던 것 같다. 윗배가 아프던 게 흉통인 줄 알았는데 자다 깨서 몇 번 트림을 하고 난 뒤 약간의 호전이 있었다. 그때 소화제를 같이 먹었더라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경험만 믿고 안일해선 안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언제 어디서건. 특히 고산에서는 더더욱. 페루나 볼리비아에서처럼 4000m 고산에 있는 도시에서 며칠을 지내는 것과, 하루만에 2000m 대에서 4000m 대까지 등산하여 올라가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신체가 고산환경에 적응할 시간도 부족하고 고강도의 운동을 병행하는 상태에서 고도까지 급격히 상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을 신경써서 돌봐야 한다.
그리도 지옥같던 밤이 지나가고 다음날 수척해진 모습으로 눈을 떴을 때, 이른 시간인데도 롯지 밖은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했다. 나와 남편도 눈곱만 떼고서 방 밖으로 나갔다.
"와아.."
회색빛 먹구름에 눈만 펑펑 내리던 어제의 흐린 하늘은 모두 걷히고 새파란 창공 아래의 안나푸르나에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천사가 두 날개를 활짝 펼치듯이. 어젯밤 그토록 우릴 떨게 했던 추위가 오늘 아침의 장관으로 보답을 하는 듯 했다. 감히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게 찬란히 빛나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