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촘롱에서부터 다시 오늘의 길을 간다. 목적지는? 특별히 없다. 갈 수 있는 최대한 멀리까지 가는 것이 목표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마에 짐을 지고 오가는 포터분들을 마주친다. 모두가 등산객들의 짐만 나르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나 생필품을 조달하는 분들도 많다. ABC에 가까워질수록 롯지의 숙박비용과 음식값 등 모든 것의 가격이 비싸지는 게 이 때문이다. 산 아래에서 윗동네까지 땀흘려 수십 kg의 물품을 날라주시는 분들의 인건비가 그에 다 들어간 것이다. 이를테면 포카라에서 한 접시에 200루피인 달밧은 해발 2000m 촘롱에선 400루피가 되고, ABC에선 800루피 안팎으로 뛴다.
우리 셋 중 항상 가장 앞서 걷는 건 남편이다. 그로부터 한 대여섯 걸음 떨어져 Su가 걷고, 거기서 두세 걸음 떨어진 맨 뒤가 내 자리다. 다람쥐의 환생처럼 날쌔게도 치고 나가는 남편은 빨리 갈지언정 우리를 두고 가지 않는다. 걷다가 지치고 지루해질만한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알고는 "자자, 이제 1km만 가면 쉬는 곳이 나오니까 좀만 참자고!" 같은 말을 던져가며 Su와 내가 뒤쳐지지 않게 고무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덕에 자칫 피로에 젖어 게을러질 뻔한 순간에도 다시 힘을 내서 남은 길을 갈 수 있었다. 나와 Su는 그런 남편을 '네팔리 가이드' 라고 불렀다. 가끔씩 가이드를 동반하여 움직이는 등산객들을 마주치면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잘 되었다. 이제 우리도 있다, 네팔리 가이드! 비록 짝퉁이지만..
남편은 실제로 외모도 네팔리로 오해를 자주 받았다. 아니 자주도 아니고 매번이라 해도 되겠다. 등산로에서 만나는 네팔 현지분들이 남편만 보면 네팔어로 말을 걸어왔다. 네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려도 고개를 갸웃하시며 자꾸 네팔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분들도 몇몇 계셨다.
한번은 중간에 어느 카페에서 음료를 시켜놓고 쉬어가는데 주인 아주머니께서 남편보고 "유, 네팔리?" 하고 역시나 어김없이 물어오셨다. 남편은 웃으며 "네 맞아요. 네팔 사람이니까 커피값 쪼끔 깎아 주시는 거죠?" 라며 넉살 좋게 농담을 던졌다. 아주머니는 통쾌하게 웃으시면서 "하하 그러죠 뭐~" 하셨다. 한손에는 진동마사지건을 들고 오금쟁이에 갖다 대고 계신 걸로 보아 다리가 아프신 듯 했다. 나는 갑자기 오지랖이 발동하여 '마사지건 이리 줘보시라' 하고는 허리, 고관절, 다리까지 꾹꾹 눌러 마사지를 해드렸다. "어머 어머 시원해라~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며 아주머니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틈을 타 나도 "이 정도면 레몬차 공짜로 마셔도 되나요?" 하고 정말 농담으로 한마디 던져보았는데 아주머니께선 "그럼 그럼~ 얼마든지 마셔요!" 하시는 게 아닌가. 큰일났다. 이러다 남편도 나도 부부사기단으로 불릴 판이다. 우린 서둘러 장난으로 드린 말씀이라고 손사래를 쳤고 남편도 국적을 이실직고했다. 아주머니는 남편이 오죽 네팔리같아 보였으면 외국인이라는 걸 오히려 믿기 힘들어하시는 눈치였다. 정말로 네팔사람 아니냐며 꺄르르 웃으시다가도 실눈을 뜨고 아직도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기도 하신다.
쉬는시간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다시 길을 나서며 마신 음료값을 내러 아주머니께 갔다. 그런데 정말로 돈을 다 안 받으신다.
"네? 진짜로요?"
"그럼요. 유 아 네팔리 바보!"
"바..바보요?"
"그래요, 네팔리 바보라고요!"
'바보' 라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매우 익숙할 단어가 바로 떠오른다. 하지만 네팔어로 '바보'는 '우리 아들'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네팔의 피는 하나도 섞이지 않았지만 그날 남편은 아주머니의 아들내미가 되었다. 한국어로 바보가 무슨 뜻인지도 설명해드렸더니 배꼽을 잡고 웃으시던 아주머니. 우리도 그분을 따라 많이 웃었고 또 나아갈 힘도 재충전했다.
ABC 코스는 난이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고산이라 막판에 조금 힘들 수는 있어도 그것만 아니면 우리나라의 산들이 더 타기 어렵다. 특히 초중반의 등산로는 얼핏보면 그냥 어디 동네산에 왔다고 착각이 들만큼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기도 하다. 거기다 한국분들이 엄청 많아서 앞뒤로 들려오는 한국말을 들으며 걷자면 갑자기 우리나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도 든다. 히말라야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우리말로 인사를 나눌 수 있어 참 반가웠다.
오늘도 무리하지 않고 해발 2000m의 촘롱에서 시작하여 2400m의 '도반' 이라는 마을까지만 올랐다. 고도 차이가 썩 크지 않은데도 날씨는 어제에 비해 두드러지게 추워졌다. 해가 질 무렵에는 낮에 산봉우리를 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고 히말라야의 봉우리들 중 하나인 마차푸차레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 광경을 보러 롯지의 숙박객들이 마당에 모여든다. 모두들 사그라드는 햇빛의 끝자락에 걸친 봉우리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우리도 내일이면 다시 계속될 ABC 로의 여정이 순탄하기를 바라며 봉우리에 시선을 머물렀다. 부디 굿럭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