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의 킨타마니 지역에는 바투르 화산이 펄펄 끓는 마그마를 품은 채 더운 숨을 뿜어내고 있다. 화산은 이따금 부지불식간에 요동을 쳐 마을을 흔들기도 한다.
그 날은 킨타마니의 한 호스텔에서의 첫날이었고 저녁 식사 후 어스름 속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을 때였다. 처마 밑에서 호스텔 사장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이상하게 발 밑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와 사장님 둘 다 일시정지. 1-2초가 흘렀을까.
"지진이에요!"
사장님의 외침과 함께 땅의 흔들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커졌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과 그 옆의 테이블도 덜덜 떨린다. 사장님은 안고 있던 어린 아이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가셨고 나는.. 나는 어떡해야 하지? 아 맞다 붑커 어딨지?! 아까 화장실 간다 그랬는데?
나>> 붑커! 붑커!
화장실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붑커가 벌컥 문을 열고 나왔다.
붑커>> 와 이거 뭐야?!
나>> 지진이래! 이럴 땐 밖으로 나가야 해, 얼른 가자!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지진이 났을 때 주변에 높은 빌딩이 없다면 최대한 건물들에서 떨어져 공터로 나가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나>> 어? 멈췄어..?
예고 없이 찾아온 지진은 멈출 때도 순식간에 멈췄다.
휴 다행이다.. 아니 그보다 또 이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이불로 쏙 들어갔다. 지진이 나면 아무리 폭신한 이불도 우릴 지켜주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뭐라도 감싸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반면 붑커는 왠지 즐거워 보인다.
붑커>> 내 인생 첫 지진이야! 너무 신기해.
정말 별나다니깐. 무섭지도 않냐구.
나도 내 인생 이정도로 흔들린 지진은 처음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손에 땀이 쥐어졌다. 머릿속에선 별의 별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중이었다. 아 내일 바투르산 트레킹 투어 신청해놨는데 올라가다가 터지는거 아냐 이거? 옛날에 인도네시아에서 큰 지진이 있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데. 또 그러지 않으리란 법도 없잖아. 불안해서 오늘 잠이나 잘 수 있을까. 나 집에 돌아가는 비행기 탈 수 있겠지? 지금이라도 쿠타로 다시 돌아갈까..
붑커>> 무서우면 그냥 내일 돌아갈까?
뜨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질문에 나는 부러 더 센척을 하며 말했다.
나>> 절대 그럴 순 없지. 내일 바투르산에 꼭 가서 해 뜨는 거 볼거야.
실은 바투르산 정상에서 보는 일출이 장관이라 하여 이 곳 킨타마니까지 온 것이다. 여기 온 목적은 달성해야지. 암.
걱정과는 다르게 그날 밤 나는 꿀잠을 잤다. 여진인지 또 다른 지진인지 자기 전에도 한두번 더 흔들림이 있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잠들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조언 덕이었다.
붑커>> 걱정 마. 여기선 자주 있는 일인가 봐. 심각한 상황이었으면 지금 밖이 이렇게 조용하겠어? 다들 그냥 할 일 하는 걸로 봐서는 안심해도 될 것 같아.
정말 맞는 말이네. 아니 아까 그럼 호스텔 사장님은 왜 그렇게 화들짝 놀라신 거지?
나중에 여쭤보니 미세한 지진은 종종 있지만 이 정도 흔들리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고 하셨다. 근데 얘기하시는 호스텔 사장님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두려움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웃음을 띤 채로 '하핫 이번 거는 좀 셌네요 하하하' 이런 말투로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대피하실 때도 '으악 지진이야 살려줘'가 아니라 마치 해수욕장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 뒷걸음질 치며 노는 아이들처럼 '꺄아아' 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킨타마니의 주민들은 강심장인 게 분명하다..
트레킹은 새벽 3시에 바이크를 타고 산으로 이동하며 시작된다.차가운 새벽 공기를 막아줄 겉옷을 껴입고 가이드님을 따라 밤길을 출발한다.
산의 입구에 다다르자 돌이 많고 울퉁불퉁한 길이 나온다. 가이드님의 바이크는 낡았어도 매뉴얼이라 흔들림 없이 잘 가는데 오토인 우리 바이크는 뒤뚱거린다.
등산로 입구에 바이크를 주차하고 이제부터 본격 트레킹이다. 랜턴을 머리에 달고 땅을 비춰가며 한 걸음씩 내딛는다. 처음엔 물기 있는 흙길이었는데 올라갈수록 자잘한 현무암 덩어리들과 화산재로 등산로가 매우 미끄러웠다. 아.. 여기 화산이었지. 무슨 배짱으로 샌들을 신고온거지. 신발 사이로 돌멩이들이 굴러 들어와 발바닥을 콕콕 지압하며 걸음을 방해한다. (저처럼 샌들을 신고 가시는 분들은 아마 안계시겠지만 가실 때 꼭 등산화나 튼튼한 운동화를 신으세요..아 물론 샌들 신고도 가능은 합니다..)
그래도 오랜만의 등산에 기분이 좋아 발의 불편함은 금세 잊혔고, 생각보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정상을 밟았다.
일출 직전 운무에 싸인 마을.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 가이드님이 달걀과 바나나샌드위치를 간식으로 주신다. 이 달걀과 바나나는 조금 특별하다. 바로 화산에서 분출되는 뜨거운 증기를 이용하여 쪄낸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안쪽 깊은 곳에서 터져나온 증기의 맛이 배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새벽 공복에 등산을 한 뒤여서였는지 몰라도 달걀이 평소보다 몇배는 꼬숩고 맛있었다. 달큰한 바나나 샌드위치는 말할 것도 없다.
화산으로 달걀 익히기.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일출을 기다린다.
그리고 얼마 뒤.
천천히 떠오르는 아침 해가 만드는 경이로운 장면.
광활한 대자연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반대편의 구름도 멋있다.
화산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보기.
바투르 화산의 뜨거운 날숨. 지구가 살아 숨쉬는 게 느껴진다.
그 어떤 인조의 힘도 들어가지 않은, 오로지 자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절경을 넋놓고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이 들었다. 아무리 가진 게 많고 큰 권력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 떠오르는 태양을 도로 집어 넣을수도, 폭발하는 화산을 틀어 막을 수도 없다. 인간의 역사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고 낙후된 부분은 개발을 하면서 발전해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도 지혜가 될 수 있다. 이 지구상에 사는 한, 우리는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그 조화로움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 그 안에서 우리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정말 인간다운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래야 자연도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얼굴을 오래도록 보여줄 것이 아닌가.
트레킹이 끝난 날 저녁에도 한 차례 땅이 흔들렸다. 순간 엇 소리가 나왔지만 미미한 떨림임을 감지하고는긴장을 풀었고 이내 지진은 그쳤다. 어제의 허둥댔던 내가 생각나면서 픽 웃음이 나왔다. 잽싸게 뛰어봤자 어차피 나는 대자연의 손바닥 안에 있는데. 잠깐이나마 여길 벗어나야 하나 생각했던 게 우습다. 해봤자 무의미한 걱정은 떨치고 여행을 즐기면 된다. 그도 그럴것이, 교통사고 발생률이 그렇게 높은데 평소에는 그럼 차에 치일까 무서워 어떻게 돌아다녔나. 여기서도 킨타마니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면 된다. 그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호스텔 사장님처럼 꺄아아 하면서 밖으로 피신할 마음의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