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하고, 빈 곳 많고, 흐려서,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일 년이라는 시간은 스침일까 머무름일까.
스침과 머무름이라는 것은 전체라고 볼 수 있는 시간의 총량, 완벽하게 계산하지 않더라도, 그 전체를 정해야 구분할 수 있겠다.
가령, 어딘가에 갔다. 거기서 어떤 이를 보았다. 그가 하는 행동과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연히 그의 삶의 단서가 될만한 어떤 단편적 정보를 듣게 되었다.
관찰한 정보와 우연히 알게 된 정보를 합쳐 다시 그에게 입혀보고 그를 조금 알겠다고 여긴다. 그 알겠음은 관찰자가 넘겨짚은 것이므로 완전한 오해일 수 있다. 진실과는 전혀 다른 각색일 수도 있다. 그러고는 상대방과 갑자기 눈이 마주치고, 관찰하던 시선을 거둔다.
여기서 시간, 즉 상대를 관찰하고, 관찰에 정보를 더하고 해석한 시간 그리고 관찰과 해석의 빈틈을 나름의 상상으로 채워 넣고 상대를 알겠다고 여기기까지의 시간은 스침인가 머무름인가.
시간의 총량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생의 긴 흐름, 요새는 백 년이라고 하는 그 흐름에 두고 보면 여지없는 찰나이고 스침이다.
시간을 압축해 본다면? 시간의 총량을 하루로 두면 그 시간은 스침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머무름에 가까울까.
다시, 일 년의 시간을 생각해 보자.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밀도 높지 않은 시간을 누군가와 보냈다고 해보자. 상대와 시간을 보냈다고 하기에도 서먹한 사이에서 어쨌든 반복적으로 만난다.
깊어지지 않는 대화의 층위에서 상대가 꺼내놓는 모습으로 상대를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해석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상상으로 채우고, 이해를 해버리고 만다. 이해라는 단어 대신 정의해 버렸다든가, 판단해 버렸다든가로 바꾸어도 무관하다.
비율이 문제일까? 하루 안에서 눈 마주침 정도의 시간이나, 백 년의 생애에서 일 년의 시간이나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작아서 이 시간들은 스침인 걸까?
아니면 밀도의 문제일까? 일 년의 시간이 스치듯이 짧다 하더라도 그 시간의 밀도가 높았다면 그것은 스침이 아니라 머무름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밀도... 밀도가 높다면 아무래도 상상의 공간이 줄어든다. 감추던 것이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곤 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튀어나온 모습은 슬프게도 대부분 흉하다. 초라하다.
어쩌면 스치는 것이, 밀도를 채울 만큼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느슨하고, 빈 곳 많고, 흐려서,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