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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Apr 15. 2023

단주를 선언합니다

음주인생 18년의 막이 내리다

말이 거창하지만, 내가 드디어 진정한 단주를 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20년 가까이 애주가이자 에피소드 메이커로 활동했던 내가, 단주를 하고자 한다.


사실 ‘술’에 대해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라 끝이 날리 없는 컨텐츠인 것에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내 치명적인 약점에 가까워서 세상에 드러내기는 싫었다. 하지만 미약하지만 단주를 선언한지 11일째가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글을 써내는 매일매일이 다짐의 연속이길 바라며, 그 다짐이 지속되어 결국은 성취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에 발가벗은 기분으로 글을 쓴다.


그 날‘도’ 거절하지 못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 선배가 불러 나간 자리에서 만취되어 블랙아웃이 된 2023년 3월 31일(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술을 끊어내야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거절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분위기 맞추려, 자리에서 튀지 않으려, 눈엣가시로 남지 않으려 마셔왔던 술은 내 인생에서 내가 존재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날도 가기 전 남자친구에게 내내 피곤함을 토로하면서도 “다녀와서 푹 쉴게. 어쩔 수 없지. 가기로 했으니까 다녀와야지.”하며 끝내 가고야 말았다. 그러면 안 되었는데.


처음부터 이상했던 조합이었다. 회사 선배(40대 남성), 그의 친구(선배의 고향친구, 40대 남성)와 나(30대 여성). 평소에도 (술로) 잘 챙겨줬던 선배라 거절하지 못한 자리였다. ‘이 자리를 끝으로 이제 이 분과의 자리는 끊어야겠다.’ 생각하며 갔던 자리이기도 했다. 만날 때마다 과음을 하게 되고, 중간에 도망칠 수 없이 꽤 강제적인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도 그랬다. 나는 자리가 어색하면 그 어색함을 지우려 술을 홀짝대는 버릇이 있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몰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엔 나만 취해있게 만드는 아주 고약한 버릇이다. 접점도 없는 40대 남성 둘 사이에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그저 리액션봇이 되어 웃고 끄덕이고 홀짝대길 반복했다. 어느 새부턴가 기대매출이 없는 접대를 하고있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부터 술로 사람 비위 맞추기엔 익숙해서 한 번 술자리를 같이 했다치면 수많은 형님들을 양산했던 나인데 이상하게 그 날따라 ’접대부‘같았다. 말의 첫 마디마다 ’오빠가‘는 빠지지않고 등장했고, 1차의 끝에서는 “얘 노래 잘해. 춤도 잘 추고. 잘 놀아.”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이런 말을 듣고도 2차를 가서는 노래를 불렀다. 나 스스로를 그렇게 취급하고 싶지도 않았고, 노래방에 못 간지도 꽤 됐는데 노래나 불러제끼자 하는 마음으로. 1차만 하고 도망치리라 마음 먹었던 것은 흔적도 없었다. 술이 나를 집어삼키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가라오케로 2차를 가서는 말 그대로 술이 술을 부르고 결국 나는 술에 잡아먹혔다.


블랙아웃이 잦아 언젠가부터 술 먹고 난 후의 기억은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살았다. 내 정신은 off되어도 누굴 해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더 마음놓고 만취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사랑하는 남자친구에게 악다구니(기를 쓰며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하는 짓)를 치고, 집을 찾아가지 못 해 친오빠에게 데리러오라고 하고, 울고 또 울고. 최악이었다.


오빠는 전화상으로도 너무 울어대니 밤 12시에 편도 2시간 거리를 달려 나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나에게 왜 울었냐 물어보니 ”내가 접대부 같아서“라고 했다고 한다. 남자친구는 집을 찾지 못하고 욕만 해대는 나를 걱정해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었다고 했다. 민폐라는 말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는 것 안다. 나 자신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다시금 일깨워본다.


어쨌든 그 날 이후 오빠와 남자친구는 금주령을 내렸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4일 후, 전출가는 다른 선배의 송별회를 이유로, 분위기만 맞춰주자는 이유로 나는 또 술을 입에 대었다. 다음 날이 되어 나는 구제불능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정확하게는 2023년 4월 5일(수) 나는 금주를 시작했다. 이제는 나에게 허락될 융통성은 없다. 한 번 입에 대면 블랙아웃이 되어야만 끝나는 알코올사용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몇 년동안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조절 가능하다고 믿었다. 적어도 눈만 뜨면 술을 찾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조절이 안 되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이제는 내가 나를 통제해보려고 한다. 나에게서 술을 지우기 위한 몸부림의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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