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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Oct 13. 2023

지워지지않는 강렬한 매개들

무더운 계절이 지나 땀이 식고 어느새 찬 바람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나는 중학교 3학년 때의 가을과 겨울 사이 백화점 옥상이 눈 앞에 잠시 왔다간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가을 언저리는 그 날의 기억과 자동 연결되어지는 시스템이 있는 것 같다.

뭣모를 때, 지금도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그 때의 기억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데이트를 했는지도 모를 한 연애상대가 나를 추위에 떨게 만들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동네 사람들끼리 동네 슈퍼라고 부르던 백화점 하나가 있었는데, 그 곳은 물건 사는 것만 빼고 다 하던 백화점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는 장소로는 그만한 곳이 없었기에 자주 찾는 만남의 광장 역할이 더 큰 곳이었다. 그 때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갔었고, 주변에는 연말 준비로 작은 앵두조명들이 옥상의 나무에 걸쳐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출처 : 주제 없는 오늘의 일기 블로그 (문제시 삭제)

대략 이런 분위기.. 였다.


아무튼 나는 추위가 피부로 느껴질 때마다 이 날의 기다림, 쓸쓸함, 누군가가 나를 떠나는 듯한 감정이 함께 지나고 괜스레 쌀쌀한 날씨가 정없이 다가온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감정들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향에도 많은 기억들이 남아 특정한 향을 맡으면 그 향에 입력된 기억이 툭툭 튀어나오는 편이다. 옛날 값싼 문구점 향수에서나 날 법한 향으로 연결되는 기억은 중학생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났던 날라리 남자애에 관련한 것인데, 이 친구는 참 못된 것이 나에게 몹쓸 짓을 시도하려다가 내가 격하게 거부를 하고 도망치니 "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처녀성을 잃을거야"라고 뱉었던 사람이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마녀의 저주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 향이 스치면 그 저주에 걸리지 않은 나, 현재까지 멀쩡한 어른으로 자란 나를 더 아껴주고 싶어진다. 그 놈은 어디선가 비슷하게 살고있을테고.


가수 노을의 '그리워 그리워'를 들으면 2012년 겨울 새벽 1시, 부산 황령산 전망대 아래 비탈길에 차를 세워두고 광안대교를 바라보던 그 시간이 떠오른다. 노래가 재생되던 처음 도입부부터 클라이막스로 치닫던 순간까지. 바깥 공기가 차가워 앞유리가 온통 습기로 가득 차기도 했다. 조용한 분위기에 노래만 가득하던 그런 날도 떠오른다.


나는 과거에 조금 기울어있는 사람인 것 같다. 과거를 떨쳐내야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 거라 여겨 계속해서 과거를 지우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이미 새겨져 있는 기억을 지울 방법은 없었다. 뜬금없이 툭하고 튀어나오는 기억들을 막아낼 방도도 떠오르진 않는다. 달리 생각해보면 그런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너무 쓸쓸하게만 남아있는 지난 시간들은 조금 조용히 튀어나오도록 다독여봐야겠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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