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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Oct 19. 2023

어느 가을 소풍같은 출근길

오늘은 회사 합숙소로 들어온지 18일째가 되는 날이다.  여자 셋이 모여사는 방 2개, 거실, 주방으로 된 작은 아파트다. 여기서는 각자를 위해 나름의 룰이 있다. 출근시간에 씻는 시간이 정해져있다는 것. 나는 06시 50분, A 대리님은 7시 10분, B 대리님은 7시 30분에 씻기로 입주 첫 날 약속을 했다. 그래서 첫 타임에 씻게 된 나는 본의 아니게 세미 미라클 모닝을 실천 중이다. 신혼집에 98% 이상의 짐이 있는 상태라 매 주말마다 신혼집에서 캐리어 하나에 일주일치 짐을 챙겨오는 상황에 자거나 씻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기 때문에 집에서의 내 행동반경은 매우 좁아졌다. 6시 40분 기상 후 샤워, 7시 출발. 예전에 지내던 곳에는 버스로 통근할 수 없는 지역이라 매일 자가용을 움직여야했는데 합숙소에서는 도보 15분 정도 가면 회사로 가는 유일한 시내버스가 다녀서 요즘에는 거의 이 버스를 탄다. 신혼집이 왕복 4시간이라 운전에 지친 것도 있었겠고, 매일 여유없이 바삐 출근하는 것에도 지쳤는지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 나에겐 여유를 만끽하게 해준다.


아, 오늘 글을 쓴 계기는 오늘도 그런 출근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마침 내가 누리고 있는 여유가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7시에 집을 나서 맞은편 아파트 상가의 자그마한 김밥집에서 김밥 한 줄을 포장한다.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 뮤직에서 '가을 아침 재즈'를 검색하니 많은 플레이리스트가 준비되어있어 적당한 썸네일로 골라 재생한다. 그러고는 김밥이 포장된 호일을 먹기좋게 정리한다. 며칠간 눈여겨보던 참땡김밥을 샀는데 가게에서 가장 고가의 깁밥이었다. 그래서일까, 어제 먹었던 김밥과 크기가 달라 와아앙 하고 먹어도 김밥 옆구리가 터져버린다. 자꾸만 참치의 마요네즈 소스가 입가에 묻어 오늘 아침에는 조금 난리였다.


선선한 공기에 바람 하나 없는 아침, 한적한 원룸촌을 가로질러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매일 같은 경로지만 늘 다른 관전포인트가 존재한다. 마주치는 사람도 다르고 풍경도 다르다. 그런대로 소소한 재미를 준다. 지나는 길에 있던 까마귀 떼가 오늘은 없었다. 서른 넘어서야 새가 무서워져 비둘기나 까마귀를 피해 길을 건너야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내 길을 온전히 갈 수 있었다. 김밥 먹으며 좋은 음악을 듣고 부정적인 생각은 비우고 하루를 미리 그려보기도 하니 여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어디에선가 하루의 첫 시작이 그 날의 기분을 좌우한다고 했었다. 내가 내 하루를 오롯이 운영하기 위한 시작이 아침 출근길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것인데 나름대로 잘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순간이 하루를 만들고 하루가 내 1주, 1달, 1년, 어쩌면 평생을 이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허투루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오늘도 긍정에너지로 하루를 시작해본다. 먼훗날의 긍정적인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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