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인 Dec 19. 2023

강제 골드미스의 삶 2일차 일기

아침에 일어나 청국장으로 뜨끈하고 든든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돌이키고 싶지 않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로서는 결혼을 앞뒀을 얼마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Ex는 자신만의 루틴이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 루틴에 따라 움직였고 거기에 내가 맞추지 않으면 당연하게도 혼자 식사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배꼽시계는 아침에 눈뜨면 울리게 설정되어있어 뭐라도 먹어야 몸을 쓸 수 있도록 해주니 그의 루틴에 맞추기에는 내 몸의 저항이 꽤 거센 편이었다. 어쩌다보니 청국장, 계란후라이에 밥을 먹는데 그 때 생각이 났다. 내가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운동하고 들어와 내가 차려준 식사를 하던 그가 생각이 났다. 두어달 전이었나, 그렇게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하는데 연신 맛있다며 호들갑 떨며 먹는 그의 모습이 너무 보기싫었다. 내가 엄마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밥을 차려 먹이는 형태가 돼버린 우리가 싫었고 그 중에 내가 싫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 밥을 먹는데 한 상을 더 차리지 않아도 되어서 나도 모르게 안도가 되었다. 빨래를 하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1인분의 양이 줄었다 뿐이지 달라진 게 없어서 조금은 허탈했다. 그의 허전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있다. 허전함을 느꼈던 단 한 순간은 큰 침대에서 혼자 자다가 허전함에 깨었다. 그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공백에 허전했던 거겠지.


34평이었던 신혼집(더이상 이 단어는 쓰지 않겠다..)이었던 집에서 27평의 내 집으로 이사오고나니 구조만 조금 바뀌고 구성은 그대로라 익숙한 느낌이기는 하다. 수납공간이 바뀌고 손 댈 엄두가 안 나 당분간은 방치할 예정이지만 다음 주엔 내 손에 맞게 물건의 위치를 싹 조정할 것이다. 이사업체에서도 이것까진 어쩌지 못했을 테니.


내 요리 s2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는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해먹었다. 친구의 메뉴 추천이었는데, 마침 나도 얼마 전부터 바질페스토가 너무 당겼던 지라 바로 콜! 하고 장봐서 요리를 했다. 가성비가 조금 떨어지나 싶었지만 가심비는 충분했으니 당분간 있을 절약에 앞서 만찬을 즐긴 거라 해두겠다. 화이트 와인과의 조화가 완벽했다. 그리고 알쓰인 나에게 수면유도제의 역할까지 해주니 기가 막힌 낮잠을 잘 수 있었다.


아까는 낮잠에서 깨어나 라면 하나를 때리고 소화시킬 겸 음식물쓰레기도 버릴 겸 아파트 앞 공원에 산책을 다녀왔다. 사람에 지치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꽤나 외곽의 동네에 집을 구했는데 내가 보기엔 이보다 완벽할 수가 없다. 원래 시끌벅적한 건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공황 같은 증상이 올라오는 사람이라, 허허벌판인 이 동네가 나는 너무 좋다. 집 안에만 있을 때는 창 밖이 캄캄해 사람이 살긴 하는가 싶었는데 단지 내 불빛이 많은 걸 보니 사람은 사는 곳인 듯 해 조금 긴장을 덜었다. 체력이 바닥난 여자 1명이라 누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대처하나 걱정하는 와중에 걸어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더 많이 보였다. (그래봤자 산책 중 만난 사람이 10명도 채 안 되지만..) '크리스마스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켜고 패딩 가슴팍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걸었다. 사람이 없으니 노래를 틀어도 거슬릴 게 없었다. 오히려 좋아.


최근 지인과 함께 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첫 순간부터 빠짐없이 나에게 호감을 표했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며 마치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내가 카톡을 하다가 잠든 날에는 하루의 마지막을 공유했으면 좋겠다며 다음엔 잠들기 전 굿나잇 인사를 해달라고 했다. 순간 그 말을 듣는데 숨이 막혔다. 그래서 연락을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전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사람은 사람으로 잊으라고도 하고, 나 또한 누군가와의 헤어짐에 이렇게나 힘들어한 적 없이 사람으로 잊는 것이 익숙했는데 이런 느낌은 또 처음이라 이번 솔로 생활은 조금 길어질 것 같다. 그리고 제발 길었으면 좋겠다 싶다. 공원을 산책하다보니 이 허허벌판의 동네에 자리잡길 참 잘했다 싶은 것이 그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외출금지 시킨 느낌이랄까. 짧았던 썸 아닌 썸의 시간에서도 그에게 어떻게든 맞춰주려는 나를 보며 인간 덜 됐구나 싶어서, 나는 나를 이 집에 넣어두려고 한다. 막상 있다보니 할 것도 많고 하루는 짧다. 그러기엔 이 일기가 너무 길어져버렸지만, 아무튼 오늘도 굿나잇!(급마무리:D)

작가의 이전글 신혼집, 안녕. 이제는 진짜 안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