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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Jul 10. 2023

몽골 10 ~몽골에 대한 설왕설래

지난 1,00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 칭기즈칸

*여행기를 sns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해 왔다.


질문) 소싯적 몽골 칭기즈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책도 보고 영화도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을 대단한 영웅으로 생각하고 동경하는 마음이었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잔인한 그 당시 몽골의 전쟁광으로 인류사에서 패전국에 대하여 자행한 잔혹한 행위에 대하여 후손들은 알고는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해서 나름 답변을 달았는데 몽골여행에 대한 설왕설래, 나도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답변) 저는 전쟁예찬론자가 아니고 전쟁을 어리석은 지도자들의 광기로 봅니다. 
그를 통해 희생되는 젊은이들에 분노하고 그 어떤 이유로도 여자와 아이를 죽이는 전쟁은 반대합니다!
그러나 13세기 그 시절은 서로가 서로를 약탈하고 정복하던 시절이었지요~ 내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하기에 먼저 선수를 치고 나갈 수밖에 없었고요
제가 경이롭게 여긴 점은 어찌 국가다운 국가를 가지지도 않았던 일개 유목민족들의 부족 연합세력이 그렇게 단기간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나? 하는 점인데 물론 전쟁에서 그들의 잔인성이 더 그렇게 밀고 나갈 수도 있었다 봅니다.
대표적 예로 바투라는 칭기즈칸의 손자가 이미 정복한 곳의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상하였다죠. 그가 총사령관이었기에 그런 그를 부사령관이었던 명장 수부타이도 제지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쟁 중에 일어나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상상을 초월하며 잔인하고 참혹할 수 있기에 그래서 저는 전쟁은 무조건 반대합니다.
그리고 일단 지배하고 나서 일어나는 잔인함은 일본의 경우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남아 등지에서도 참혹했었죠. 남미의 스페인식민지에서는 금을 가져오라며 손목을 자르는 등, 미국도 원주민들에게 아프리카 노예문제 인종차별 등등. 그에 비하면 몽골제국은 피정복민인 색목인들을 기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 인종,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두루 인재를 등용하고 포용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봅니다. 


~~ 이렇게 답변해 두고 나도 좀 더 찾아보았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미국 ‘워싱턴 포스터’지가 "20세기를 보내면서 지난 1,000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누구인가?" 리서치해서 선정한 인물은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유럽에 자유의 사상을 뿌린 나폴레옹이나 미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나 과학계의 핵 진보를 가져온 아인슈타인도 아니고 동양의 전쟁영웅 칭기즈칸을 최고의 인물로 선정한 것이다.      


그렇게 선정한 배경적 이유가 뭘까? 해서 찾아보면서 나도 나름 생각해 보았다. 

뛰어난 전쟁영웅으로서의 칭기즈칸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넓은 땅을 정복했다면 그의 남다른 탁월한 지도력은 그 정복이 세계 최초로 동서양 세계를 연결하고 통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는 말에 나도 무척 공감이 되었다.  전쟁영웅으로서는 땅을 정복했지만 지도력으로서 그 땅을 통합했다는 점에서.    



그의 제국은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육상 · 해상 교통로를 굳건하게 했고 인터넷보다 700년 앞서 동서 간 경제 · 문화 교류를 촉진시켰다. 서방 세계와의 원거리 무역에 관심이 많았던 칭기즈칸은 비단길을 오가던 이슬람 상인들을 특별히 우대해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제국의 보호아래 기독교 · 이슬람교의 동방 전파도 가능했고 지리학 · 천문학 · 역학 · 수학 등 문명이 전파될 수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마르코 폴로가 있었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가슴에 품고 떠난 콜럼버스가 있었다. 

    

몽골제국 시대에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이 더 활발해졌으며, 그와 후손들이 정복한 동서양 40국이 모두 한 나라에 속하게 되어 마치 요즘 유럽연합처럼 이동이 수월해졌다 한다. 

이슬람 역사가인 아불 가지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하고 말했다.     


그가 정복한 땅의 넓이는 777만 평방킬로미터로 이는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히틀러  이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의 넓이를 합한 것보다 훨씬 넓다. 그는 고려에서부터 헝가리까지, 시베리아에서부터 베트남까지, 만주에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몽골 인구 약 150만 명이 1~2억 명의 인구를 150여 년 동안이나 통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간 단순한 유목국가나 잔인한 전쟁영웅으로만 폄하되어 왔던 그와 몽골제국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더 밝혀지고 연구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워싱턴 포스터지의 지난 천 년간 가장 위대했던 인물로 선정되고 나서 칭기즈칸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하게 이뤄지고 우리나라에서도 관련 책들이 나왔다. 고작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대륙을 정복할 때 그의 정복, 경영철학에 대한 비결에 대해서도 많은 고찰이 있었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나의 뇌피셜과 영화로 본 칭기즈칸과 역사적 팩트로 마음에 와닿는 순서대로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그의 강력한 내적 동기였을 거 같다. 

초반에는 가족에 대한 개인적 복수심도 있었지만 결국은 자신의 명리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당시 혼돈스러웠던 초원의 질서를 되찾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런 소명의식이 고난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부터 뼛속 깊이 새겨지고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던 거 같다.      


둘째, 그는 타고난 전술가이자 용자였다. 

전투를 치르기 전 철저하게 먼저 정보를 탐색하고 전쟁 시작 전부터 상대를 심리전으로 먼저 공포에 떨게 하면서 실전에는 기습과 복병등으로 전술을 펼칠 수 있었던 그는 정말 타고난 전략전술가였다 본다. 

이런 그의 면모는 어릴 적부터 고독한 이리, 푸른 늑대처럼 초원에서 혼자 생존하여 살아남으면서 배우고 익힌 경험치가 아니었을까     


셋째, 공평무사함이었던 거 같다.  

전쟁 중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적 약탈을 금지했고, 전쟁 과정에서 생긴 전리품은 전후방에서 참여한 모든 이들이 함께 나누었다. 그 역시도 병사들과 함께 누더기를 입고 형제처럼 같이 지내고 전우애를 나눴다. 

죽은 병사는 끝까지 찾아내어 장사를 치러주고 그 처자식에게 재산을 분배해 줌으로써 몽골 병사들은 죽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고 처자식에게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성하며 절대적으로 그를 따랐다. 

특히 병사들의 신분이나 출신을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충성심으로 우대했다. 천민 출신인 부하를 곁에 두어 그 부하는 3대를 이어 충성하였고 칭기즈칸은 그에게 금나라를 물려주었다.

    

넷째, 속도전과 정보 전이었다. 

역참제도를 이용해서 릴레이식으로 정보를 주고받았고 몽골말들은 유럽말보다 더 오래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 군인들은 철갑옷, 투구, 창을 비롯한 개인 장구 무게가 70kg이었는데 몰골 기마병들의 무장은 양털모자에 활로 기껏해야 7킬로그램에 불과했다 한다. 무게가 가벼우니 말도 더 빨리 오래 잘 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치 식량에 해당하는 소 반 마리 분의 고기를 육포처럼 말려서 휴대하고 다니면서 식사시간도 줄이고 행군할 수 있었다. 이러니 쓰나미처럼 갑자기 몰아닥치는 몽골군들에게 유럽인들이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을 수 있다 본다.


그리고 몽골군은  나무 안장 위에서 말을 탔기에 안정된 자세로 뒤로 보며 활을 쏘고 달리는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도망가면서도 활을 쏠 수 있으니 치고 빠지는 그들의 전술이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들도 적군 포로로부터 재빨리 습득하고 개발해서 사용했다. 

업그레이드되는 새로운 활, 삼각 철화살, 반달칼 같은 신무기를 계속 개발해서 사용했는데 정보시대인 요즘으로 봐도 이는 모두 정보에 의존한 속도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열린 마음이 아닐까 싶다. 요즘 말로는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다.

 적으로부터 잡은 포로들 중에서도 능력이 있는 기술자, 군인, 학자들을 포용하고 활용했기에 한낱 유목민족이었던 그들이 금나라로부터 공성기술도 물려받아 유럽의 여러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의 옆에는 명장수들과 막강한 그의 친위부대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수부타이를 세계의 명장으로 꼽았는데 그는 끝까지 충성을 다한 칭기즈칸의 오른팔이었다. 


부하들에 대해서 인종, 국적, 신분에 대해 차별 없는 그의 마음이 그런 충성심을 우러나오게 했을 것이다.

 그는 그가 가진 권위에도 불구하고 위계질서는 유지하되 평등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본다. 

함께 먹고 함께 싸우고 함께 생활하며 열린 마음으로 임했던 그는 실로 그 당시로는 보기 힘든 열린 마음의 탈 권위적 소통의 대가였을 거라 본다. 그래서 칭기즈칸, 그는 세상을 평등하게 대하고 만든 사람이 된 것이다. 


들쥐를 잡아먹고 연명한 그, 아내와 어머니를 약탈당하고 아버지가 살해당한 그, 친지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아 대평원에서 사고무친 뼛속까지 외롬과 설움 고통을 당해본 그는 역지사지였을 까? 그가 드디어 정상에 올랐을 때 열린 마음의 수평적 리더가 될 수 있었다. 그를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 역시 그런 그에게서 인격에 대한 신뢰로 함께 시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그의 말이다.     


"나는 군사 100명으로 적군 10,000명을 마주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적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존재했다.
그렇게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마침내 칭기즈칸이 되었다.”






첨언해서

내가 만난 몽골인들과 그곳의 교포에 대해 느낀 점을 얘기해보려 한다.


처음 알마티에서 몽골로 가는 비행기 내 옆 좌석에 앉았던 분 얘기가 좀 의외였는데 본인은 몽골 6년 차 개인사업을 하고 있고 몽골 와이프와 사는데 아직 혼인신고를 안 했다 하셨다. 그리고 내게 여행하면서 몽골 사람 말은 5%만 믿어라, 그만큼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좋으나 쉽게 믿고 다 맡겼다가는 큰코다친다는 등 나는 사실 그런 사례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고 또 현지에 가서도 몽골 사람에게 돈 떼이고 고초를 겪는 교포들을 봤기에 아! 정말 그런 게 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도대체 왜 그럴까? 그냥 먹튀? 먹고 튀는 식이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 다니는  유목민 근성일까 싶기도 했지만 아직 까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찾아보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더 되려나 싶다.


내가 여행 가서 도움을 받은 김 선생님 같은 경우도 정말 친동생처럼 여기며 모든 걸 맡긴 몽골 동생이 차도 팔고 뭐도 팔고 다 챙겨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또 우리와 같이 자주 식사도 한 다른 교포분도 사업 빌미로 빌려준 돈을 내내 못 받아 애를 먹고 있었다. 물론 사정이 여의치 못해 돈을 바로 못 갚는다 해도 오늘 준다, 내일 준다는 식으로 신뢰를 저 버리는 행동을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 본다.


몽골통 김샘말씀으로 이곳 울란바토르에서도 한때 아파트 건축 열풍이 불면서 한국 사업가들이 제법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한다. 그러나 그들이 대부분 다 망하고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데 그 원인이 이러하다며 말씀하시는데 공감이 갔다.

보통 편의점이나 식당과는 다르게 건설업 쪽으로는 다 몽골정부와 정치인들과 함께 엮여서 돌아가는데 그런 오랜 세월 존재해 온 이곳 내부 시스템을 잘 모르는 한국사람들이 와서 그냥 인풋 아웃풋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멋 모르고 덤볐다가 망하고 나간다는 거다. 

그냥 친구로서는 친절할 수 있으나 사업, 일적인 관계로 들어가면 어쩌면 몽골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말아야 할 거 같다.





그런데 그 외에는 내게 몽골사람들의 품성이나 생활력 같은 것은 좋게 보였다.

내가 만난 이름을 까먹은 몽골여인은 한국식당에서 일하고 온 삼십 대 초반이었다. 한국에서 제주도와 다른 곳에서 11년을 일하고 들어왔는데 자기한테 집 한 채, 차 한 대 남았다고 했다. 왜냐면 맏딸이었던 엄마의 외가댁 식구들과 자기 부모형제들까지 먹여 살리면서 그간 한국에서 번 돈을 다 갖다 바쳤다 했다. 대학 다니다 19살에 한국 나가서 한국말은 일하면서 배우며 그리했다고.


지금 몽골에는 독학으로 한국어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한국어 교재도 잘 나와있고 이전에 우리가 독일로 광부, 간호사로 가고 그리고 그 후 어메리컨 드림을 꿈꾸며 나갔듯이 이들도 한국에 가서 돈 벌어서 돌아와서 몽골에서 자리 잡고 살기 원하기에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는 것 같다. 정말 열성도 있고 끈기가 있어 보였다.

그들의 바람대로 한국에서 좋은 경험도 하면서 돈 많이 벌어서 부디 원하는 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미니사막 일정의 가이드였던 보석씨는 대구에서 3년 일하다 와서 지금 차를 장만해서 일을 시작했는데 다행히 한국에 대해서 다 좋은 기억들을 갖고 있었다. 함께 여행하는 동안 인성적으로 좋게 느껴진 점이 늘 남을 먼저 배려하면서 게르의 어린아이들이 엔간히 성가시게 해도 몇 시간을 함께 놀아주는 훈훈한 사람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자기 일도 아닌데 사람이 좋으니 아이들에게 마냥 친절하고 훈훈했다 본다.

보석씨가 마련해서 처음 투어를 시작한 그의 파란 차
지칠 줄 모르고 초원의 아이들과 놀아주던 보석씨, 그도 두 딸의 다정한 아빠였다.


고비사막 투어 함께 했던 가이드 아무라도 35살인데 한국에 한 달 밖에 안 갔다 왔는데 몽골에서 한국말 배워서 말도 잘하고 마음결이 여리면서도 속이 깊었다. 물론 가이드일을 하니 손님을 늘 배려하고 먼저 양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소소하고 세세한 마음씀이 느껴지는 게 평소 몽골여자들은 좀 기가 드센 거 아닐까 하던 내 편견이 없어졌다 ㅎㅎ 그리고 가끔 내가 까칠하게 굴어도 웃으며 받아준 마음씀이 그네들의 넓은 땅처럼 넉넉한 아가씨였다. 그렇다면 나는 작은 나라의 빨리빨리와 조급한 냄비근성 아줌마? ㅋㅋ


부모형제 가족들이 울란바토르에서 먼 훕스굴 근처에 살고 있고 많은 자녀 가운데 아무라가 맏딸이라 했다. 가족들은 아직 고비사막 홍그르헬스를 못 봤다기에 언제 한번 부모님이랑 가족들 초대해서 본인이 직접 가이드해서 여행하면 좋지 않겠냐고 하니 자기도 그게  희망사항이라고 했다. 아무라가 가이드로 돈 많이 벌어서 가족들도 몽골여행시켜줄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순박하고 맘이 너그러웠던 가이드 아무라


몽골인들을 보면서 숲을 보되 나무를 놓치지 않으면 어느 민족, 어느 국가도 개개인이 다 다르니 지나친 보편화는 삼가야 된다는 걸 재확인하고 배운다. 내가 일본을 개인여행하면서 느낀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일본이란 민족과 국가적 개념을 가지고 보는 거랑 개인 친분관계나 여행하면서 만나는 개인 일본사람은 확연히 다르다.


몽골에 보름간 머물면서 숙소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보면 다들 친절하고 순박했다.

일단 그들이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고 호감을 갖고 있어서 그런 지 우리는 몽골에서 지내기가 참 편했다.

여행하다 보면 좀 긴장되고 스트레스받는 곳도 있을 수 있는데 어쩌면 몽골은 우리가 가장 여행하기 편한 나라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비행기로 세 시간 반의 가까운 거리, 먹는 음식, 한국말을 대충 다 알아듣고 한국말하는 사람도 많다는 점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이 매력적인 나라니 더욱~!


한 때는 몽골 넓은 땅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우리의 좋은 기술력으로 윈윈하자는 계획이 정부차원에서 오간 적도 있었다는데 앞으로 더 많은 교류와 열린 외교로 진정한 윈윈 관계가 이뤄져 가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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