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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Jul 10. 2023

몽골 9 ~몽골가정의 허르헉과 슬픈 역사 이야기

허르헉과 몽골의 아픈 역사

2023년 6월 22일


울란바토르에 20년 거주하신 김 선생님의 소개로 몽골 현지가정에서 허르헉을 대접받기로 하였다.

말로만 듣던 몽골 전통요리라 설레었다. 그것도 일반 식당이 아닌 가정 초대는 귀하게 여겨졌다.


자동차 중개업을 하며 활달한 성격인 미나 씨는 호텔로 우리 일행을 직접 픽업하러 왔다. 몽골에서는 국제 면허증이 통하지 않고 그곳에서 직접 면허증을 따야 하는 관계로 교포들은 주로 현지인들에게 운전을 맡기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울란바토르에서 몽골운전의 특징은 무질서 속의 질서랄까? 끼어들기나 정해지지 않은 유턴이 다반사여서 교포들은 가급 운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다. 

그리고 이상한 건 거리에서 택시처럼 보이는 차량이 별로 없어서 물어보았는데 김샘 말이 그냥 지나가는 차 세우고 타면 그게 택시라고 한다. 엥? 무슨 말이에요? 했는데 실제로 그냥 일반 차량처럼 보이는 차를 손 들고 세워 택시처럼 타고 가고 있었다.

     

미나 씨 집은 울란바토르 교외에 있어 가는데만 50분이 넘게 걸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고비 사막투어를 떠나기로 되어있었기에 가까운 곳인 줄 알고 초대에 응했다가 솔직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런데 미나 씨와 이곳 지인들은  웃고 떠들고 가는데 왕복 두 시간 거리는 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니 역시 큰 나라라서 인가보다 했다.


집에 도착하고 보니 아들과 세 딸들, 그리고 친정아버지랑 대 가족이었다. 미나 씨는 차 안에서 농담처럼 하던 말이 자신은 돈 버는 일은 자신 있는데 요리는 대부분 남편이 한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데 정말 서너 시간이 걸리는 전통 요리인  허르헉을 준비하는 사람도 미나 씨 남편이었다. 

도착해서 우릴 위해 김치를 사 오는 등 부산한 준비를 하며 모두가 기다리는 동안 집을 둘러보았는데 나무도 심겨 있는 큰 집이어서 여러 가족이 함께 살기에 좋아 보였다.


미나 씨가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물어보니 그녀의 아버지께서 한국에 일하러 가셨을 때 거기서 학교도 다니며 한국말을 배웠다 했다. 아버지도 한국말을 잘하셨다. 드디어 요리가 완성되어 우릴 위해 찍어먹도록 참기름 쌈장까지 만들어주며 이렇게 저렇게 먹어라고 역시나 성격 좋은 남편이 두루 신경 쓰며 서빙해 준다.

정말 냄새 일도 안 나는 고기의 부드러운 맛과 식감을 즐기며 맛있게 먹었는데 한계는 있어 배가 불러 더 이상은 먹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허르헉은 돌, 야채, 고기를 차곡차곡 넣고 찐다. 유목생활을 하다 흩어졌던 가족이 모이면 이렇게 허르헉을 해 먹곤 한다. 특히 몽골 최대 축제인 나담에서도 허르헉은 반드시 등장한다. 나담은 모인다는 뜻인데 특히 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대가족과 지인들이 모이는 것보다 더 좋고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해서 그들은 나담 때 모여 용사 3종 경기도 하며 허르헉도 만들어 나눠 먹고 논다.   


허르헉을 위해 양을 잡을 때 가능한 재빨리 숨통을 끊고 양이 스르르 눈을 감으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고 한다. 마치 인디언들이 사람도 생명의 존속을 위하여 먹어야 하니 살생은 하나 늘 하늘에 기도하듯이 몽골인들의 양 잡는 방법에서도 같은 생명존중의 사상을 본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유달리 잔치를 좋아한다고 한다. 김 선생님 말씀이 잔치를 시작하면 이들은 끝을 모르거나 아예 끝장을 본다고나 할까 ㅎㅎ 한 번 모이면 그렇게 많이 먹고 마시고 오래도록 어울리니 처음에는 몽골사람들의 이런 문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아마 이것은 유목민의 오랜 관습이 아닐까 싶어졌다. 왜냐면 늘 함께 공동체적으로 묶여 지내는 그들이다 보니 내 집 네 집 구분이나 만나고 헤어지는 구분도 선명하지 않을 수 도 있겠다 싶다. 사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르촌을 보면 모두가 다 똑같은 집이다 ㅎㅎ 


그렇게 같이 지내다 유목을 위해서 헤어졌다가 넓디넓은 초원에서 다시 만나면 몇 날 며칠을 계속 함께 지내고 싶을 거고 다시 함께 이동하는 라이프스타일가운데 더 끈끈한 인간관계의 문화가 생겼지 않을까? 

그리고 사막종교의 특성처럼 여기 유목민도 손 대접을 강조하는 문화이다. 그래서 손님과도 함께 잘 마시고 마시기 시작하면 마치 이전의 한국사회가  1,2,3차로 달리듯 그렇게 하는 사람도 많다. 마유주 아이락에 익숙한 그들은 술이 세기도 하고 대초원에서 마시던 습관으로 엔간히 마셔도 취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미나 씨 남편도 그런 과인 것 같았다.


보통 허르헉은 양고기로 하는데 이번엔 한국 사람들이 염소를 더 귀히 여기는 것 같아 염소로 준비했다고 한다. 양배추, 당근, 감자, 러시아 무 등 야채를 넣고 요리한 고기는 부드럽고 야채들 중 특히 러시아 무가 고구마처럼 노란색인데 식감이 일반 무랑 다르게 맛있어서 나는 주로 무랑 고기를 같이 먹었다.


몽골 사람들에게 염소는 두루 귀한 가축이다. 영양이 풍부한 염소 젖은 맛도 좋아 인기가  많아 양젖보다 많이 이용된다. 그리고 봄이 오면 염소는 털갈이를 하고 잔털이 나는데 이 잔털이 모든 가축털 중 가장 비싼 캐시미어가 된다. 해서 염소털 캐시미어는 봄철 유목민에게 목돈을 만들어주는 귀한 자산이 된다. 고가에 이태리, 일본등으로 원재료로도 팔리나 지금은 몽골 고비 캐시미어 공장에서 완제품이 생산되어 관광객들에게 쇼핑 필수 아이템이 되고 있다.


염소고기는 식으면 금방 굳어지고 맛이 별로기에 주로 여름에 먹고 겨울에는 쉽게 굳지 않는 말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미나 씨가 설명해 주었다.

염소 가죽은 매우 단단하여  물건을 묶는 끈으로 사용되고 양털은 깎아 펠트로 만들어 게르를 덮는데 쓰고 그 외 옷이나 깔개등을 만들고 비교적 싼 낙타털은 양말, 신발 등을 만들고 두루  쓰인다 한다.


즐겁게 식사를 마쳐갈 즈음 내가 질문을 했다. 지금 몽골족은 내, 외몽고로 나뉘었고 몽골만 해도 남한의 14배가 되는 이 넓은 땅 덩어리에 몽골인구가 4백만이 안 되고 내몽고 자치구랑 다 합쳐도 겨우 인구 겨우 천만 명 밖에 안 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하니 미나 씨는 다소 흥분해서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듣고 보니  몽골 민족의 몰랐던 사실, 슬픈 역사를 알게 되고 비애가 느껴졌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사실 남미는 전염병으로 인구가 급격히 줄었고 북미는 인디언 보호 구역(Indian Reservation)이라 명하면서 말이 보호 구역이지 사실적인 감금?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엄청나게 인구가 감소했다. 그런데 몽골은 그와는 다른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인구 말살 정책이 있어왔던 게 아닐까 싶다.







몽골 역사를 보면 대원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몽골족은 북원이나 여러 부족국가 형태로 나뉘어 존재했었고 명나라 영락제가 북원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16세기까지도 그 강성함을 잃지 않았었다. 

그러다 17세기 중반 청나라가 내몽골을 점령하고 1689년 청. 러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북부 바이칼호수가 포함된 부리야트 지역을 러시아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청은 1717년 나머지 몽골 전역을 장악하고 한족, 만주족을 몽골 지역으로 이주시키면서 그들에게 농경지 개간을 시켜 몽골인들의 목축지를 황폐화시켰다. 그렇게 그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한족 상인들은 고리대금업을 하며 몽골인들을 더욱 사지로 몰아넣었다.


청나라는 몽골로부터 문자나 팔기군 같은 뛰어난 군사 조직을 받아들이면서 몽골이 다시 강해지는 것을 경계했고 그래서 인구 말살 정책을 폈다한다.

미나 씨 말로는 평원에서 몽골인으로 여겨지는 남자는 무차별 죽이는 일도 있었다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인 지는 모르나 청이 취한 보편적인 인구 말살 정책은 있었다.


첫째, 몽골인들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 함으로써 외부 소식과 차단하고 외부 세력과 결탁하여 반청 운동을 하려는 시도를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그리고 이는 또한 강력한 유목 민족이었던 그들의 발을 묶어 놓음으로써 결국 근친결혼을 하게 하여 유전적인 문제도 발생시켜 건강한 후손의 출산을 막았다.


둘째, 소위 '삼자 정책'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는 한 가정에 아들이 3명 있으면 장자는 라마승이 되게 하고 둘째는 군대에 보내어 막내만이 남아 집안을 이끌어가게 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니 3명의 아들이 있어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사람은 1명뿐이라  씨를 뿌릴 수 있는 확률을 제한시킨 것이다. 실제 몽골이 독립하였을 때 성인 남자의 40%가 라마승이었다 하니 이런 청나라의 정책은 성공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는 '한족과의 혼인 금지' 정책이었다. 이는 한족과 결혼하여 만주족인 자신들에게 대항할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한다.


결론적으로 

13세기 칭기즈칸 시기 100만 명이었던 몽골인구가 20세기 1921년 청나라로 독립할 당시 그 절반인 50만 명으로 줄어있었다는 것은 시대적  인구증가율을 두고 볼 때 결코 자연적 손실로 볼 수 없는 엄청난 인구 손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나 씨는 마지막으로 웃으면서 마치 서양에서 유대인들이 핍박받고 쫓겨 다녔듯이(그들이 머리가 우수해서) 자신들은 동양에서 유대인처럼 핍박받고(용맹 무쌍했던 과거역사로) 특별히 중국에게 그렇게 당해서 지금의 몽골로 줄어들었다며 긴 설명을 마쳤는데 듣고 나니 나도 몽골인들의 반중감정이 더 이해가 되려 했다.


어쨌든 인구 100만 명에 전사 10만으로 당시 서쪽으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부터 동쪽으로 일본의 사할린까지, 나아가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까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그들의 힘이 이렇게나 급속하게 추락한 것은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들 스스로의 자충수나 자업자득보다는 옆에 또 다른  거대 세력 때문이었다고 여겨지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아직도 양상은 덜 잔혹하고 완화되었을지 몰라도 강대국의 힘과 패권으로 이뤄지고 흘러가는 약육강식의 역사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현실로 여겨지니 씁쓸했다.


용맹스러웠던 그들의 조상 몽골병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덧 붙인다.

역사상 군대의 하루 이동 속도(km/day)를 나타낸 것에 로마 군단 최대 행군 속도 33, 고구려 기병 72 라면, 칭기즈칸의 기병 이동 최대 속도는 134였다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럽 파발의 속도는 무려 352였다 하니 정말 요즘으로 치면 정보전을 치른 거다. 속도만 봐도 평원과 산맥을 쏜살같이 달리며 뒤로 활을 쏘던 그들의 파죽지세 용맹함은 인정해야 할 듯하다. 


몽골족이 그런 용맹한 민족이었기에 
청나라로서는 두려워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중원이 아니라 전 세계를 쓸어버렸던
그 기상과 어쩌면 그 잔인함까지도!


보통 허르헉은 밖에서 요리한다는데 이 날 미나 씨 남편은 게르 안에서 하고 있었다 ~  음식재료 앉힌 모습
집 본채모습과  우리가 허르헉을 먹은 초록색 지붕 방갈로 같은 곳, 고기는 원래 야외에서 먹어야 제 맛이다
별채 같은 곳, 중고차 중개업을 하니 차 수리 공간과 차를 세워둘 장소도 넉넉한 집인 듯했다
잘 익은 야채 색갈이 더 곱다 ~  고기는 기름기 다 빠지고 야들야들^^
더운데 요리해준 미나씨 남편 ~ 막내딸이 음식을 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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