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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과 이별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님 품을 떠나

by 김별


대구로 전학


밤이면 깜깜해지던 산골 고향마을, 마치 소쿠리를 엎어놓은 거처럼 멀지만 가깝게 느껴지던 빼곡한 별들, 초등 4학년 정도에 전기가 들어왔으니 나는 촛불의 기억도 있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도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나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꿈은 어두울 때 꾼다. 그래서 눈이 부실 정도의 태양이나 전깃불이 아닌 적절한 명암은 사람으로 꿈꾸게 한다. 돌이켜보면 내 유년은 그런 꿈꾸기 좋은 온도와 명암이었다.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그 적당한 명암 속에서 마음은 자유롭게 움직였고, 상상은 현실보다 조금 더 먼 곳까지 닿았다.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합리적이며 책임감이 강한 분이었다. 교사이자 농부로서의 길을 착실히 걸으셨고, 그 모습은 나와 오빠에게 ‘생활과 의무’라는 기준을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부농의 딸로, 경제적 어려움과는 무관하게 자라셨다. 그녀의 다정함은 말보다 행동으로 느껴졌고, 강직한 보호막처럼 우리를 감싸 주었다. 두 분 사이의 조화와 균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전감을 만들어 주었다.


고향의 학교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께서 동해안 중등학교로 발령을 받으셨다. 어머니는 삼 남매를 데리고 고향에 계시다 오빠가 중학교를 가니 이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나와 오빠를 대구로 전학시키셨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쉬고 있던 사촌 언니가 아버지의 장려로 여고 입학을 하면서 오빠와 나를 돌보기로 했고 내가 다니게 될 초등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전학 첫날 어머니와 D 국민학교를 갔고 나는 한 학년이 10개 반인 몇 층짜리 길게 늘어선 학교 건물 크기에 좀 놀랐던 거 같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이 받아 펼치는 내 통지표를 본 아이들의 반응도 기억에 남는다.


체육이 ‘우’고 그다음은 다 ‘수수수~’였으니 아이들은 놀라면서 그를 떠들어대었다. 나는 한 학급이었던 시골학교에서 당연히 공부를 잘했지만 그걸 특별히 여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역시 도시 아이들이라 그런지 성적에 민감했다.


그러나 그 성적은 더 이상 내게 의미가 없게 된 것이 전학을 오니 교과 진도랑 가르치는 내용도 차이가 나서 나는 수업시간 흥미를 잃었다. 환경이 크게 바뀌니 그냥 머릿속 생각, 상상은 더 뭉게구름이 되어 몸만 교실에 있는 식이었을 거다.


하루에 몇 번 버스가 오는 거 외엔 차도 잘 다니지 않던 시골에서 육교를 건너 학교 가는 그 짧은 동안만도 수없이 차가 질주하는 이사 온 곳은 내게는 완전 다른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끔 언니랑 시장을 가는 동안 소위 ‘양공주’라 부르던 직업여성이 줄지어 있던 가게도 지나갔다. 대구의 동인동이 지금은 중앙통에 가까운데 암튼 1970년대 중반 그때는 그랬다.


전학 온 학교에서는 시골에서 보던 친구들이랑 다르게 6학년 여자들 중 조숙한 아이들은 벌써 가슴이 조금 나오기도 했다.

또 다른 기억에 남는 일은 나는 맨 앞줄에 앉으니 담임 선생님께서 나랑 짝지에게 한 가지 미션을 주셨다. 뭐냐면 4교시 수업 마치기 전에 나가 라면 물을 올려두는 것이었다. 학생의 수업권을 생각하면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친구랑 나는 별생각 없이 그리 했다.

긴 목조 복도를 걸어 나가 다른 건물에 있는 아마도 숙직실이었을 연탄불이 있는 곳에 작은 노란 양은 냄비에 물을 부어 불 위에 올려두고 오면 되었다. 그러면 수업 마치자마자 아마 선생님은 보글보글 끓는 물에 바로 라면을 넣어 드실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시킨 것이었으리라.


전학 갔을 때 내 머리는 짧은 커트 머리였다. 나는 한 번도 짧은 머리를 못 해봤기에 어릴 적 소원이 도시풍으로 세련되어 보이는 커트 머리였다. 그러나 타고난 곱슬머리는 그 찰랑거리는 커트머리가 내게는 불가능하다는 걸 해 보지 않아서 몰랐다.


부스스한 상태의 곱슬 커트머리는 내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남아풍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수학여행 사진 속 나는 시크해 보이려 애쓰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시크가 아니라 어색함의 다른 얼굴이었다. 그 작은 불편과 긴장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줄곧 긴 머리를 고수했다. 가끔 얼굴이 작으니 스트레이트를 해서 쇼트커트를 하면 몇 년은 더 젊고 세련되어 보일 거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놉놉놉 이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거나 묶고, 핀으로 고정하며 살아가는 습관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과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어릴 적 가끔 어머니가 경주 시내 미장원으로 데려가 고데기로 머리를 말아 주셨다. 그 날의 냄새, 어머니의 웃음과 기대, 그 모든 기억은 아직도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며, 삶의 온도와 빛을 떠올리게 한다. 머리를 말아주던 미장원 아주머니의 손은 늘 뜨거운 기계를 들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돌이켜보면, 그 전학이라는 사건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를 떠나 새로운 공간과 사람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만든, 나의 성장을 시작하는 작은 문이었던 셈이다.




부모님 품을 떠나서


어머니는 경주시장을 가면 딸 하나에 옷은 당신 눈에 젤 이쁜 걸 입히고 싶으셨는지 긴 머리와 어울리는 원피스, 블라우스등을 사 오셨다. 명절빔도 있었지만 한 번은 어린이날 즈음 흰 칼라에 가운데는 빨간 꽃이 있고 은색 반짝이가 들어간 하늘색 원피스를 흰색 스타킹이랑 맞춰서 입고 가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부담스러워 학교 가는 과수원 탱자나무 길을 한참 느리게 걸었고 교문 앞을 바로 들어서지 못했다.

새 옷을 입고 가는 것도 힘든데 시골 학교에서는 너무 눈에 띄는 옷이었다.


그때 마음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자라서는 옷만은 내 마음대로 편하게 입자는 게 내 나름 패션 철학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누가 뭐라든 내 맘대로 패션이고 다만 깔맞춤과 스타일만 좀 유의하는 편이다.


친정어머니는 옷 욕심보다는 마음에 안 드는 옷은 어렸을 적부터 안 입는 편이었는지라 대리만족으로 내게는 꼭 본인이 마음에 드는 옷을 입히려 하셨다.


그래서 결혼 후 나는 친정 갈 때마다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어야만 했다. 하나 딸이라고 예쁘게 입혀 키워 놓았더니 옷이 그게 뭐냐? 는 말을 매번 하셨다. 그걸 옆에서 같이 들어야했던 남편도 싫었던 지 처갓집 가기 전에는 ‘당신 또 장모님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 그리 막 입고 가냐’며 내 옷부터 점검했다.


정작 어머니는 체구가 좀 있으시고 소녀 소녀 같은 감성보다는 무난하면서 본인 마음에 드는 걸 입으셨는데 딸에게만은 당신 눈에 젤 예쁜 걸 입히고 싶으셨나 보다.

나중에 내 나이 사십 대 후반까지도 내가 들고 온 옷 중에 유독 레이스가 많은 걸 보고 싫든 좋든 어릴 때 나를 입히셨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구나 싶었다.


대구로 전학 오고 나는 어머니와 잠시 떨어져 살게 되었다. 사촌 언니가 오빠와 나를 잘 챙겨주었지만 둥지 떠난 새처럼 좀 일찍 사춘기로 접어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셨지만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문도 통과하지 못했다. 외갓집은 큰 머슴, 작은 머슴을 데린 부농이었지만 여자는 배우면 안 된다는 훈장님 같은 외할아버지 엄호령이 있었고 어머니는 당시 칠 남매 중 막내 동생을 업어 키우는 역할을 해야 했다 한다.


다행히 시골로 봉사하러 오신 소설 *상록수의 샘 같은 분이 한글을 가르쳐 주셔서 받침은 틀리지만 글을 읽고 쓰실 수 있으셨고 그 한글 실력으로 거의 매일 일기장 같은 가계부를 빼곡히 쓰셨다.

한글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말씀하셨고 그때 못 배운 한이 크고 원통해서 외할아버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거라고 내게 몇 번씩이나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내 딸은 대학 아니라 유학도 보낸다며 딸에 대한 교육 의지를 드러내셨다.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시고 바다를 유독 좋아하셨기에 내게는 마리아와 해수 관음이 연상되는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이셨다.


김별은 나의 필명이다. 나의 이름은 김성례다. 실명을 거론하는 것은 어머니 이야기가 나와서다. 둘째가 딸이다 보니 어머니는 아버지께 ‘내 성도 하나 넣어라’고 하셨다. 그래서 경주 김 씨와 창녕 성씨의 ‘김성’이 되었고 아버지는 딸이니 인의예지신 중 예의범절이 바른 것이 가장 이쁘다며 ‘예도 례’ 자를 넣어 이름을 지으셨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학교공부를 안하셨을 뿐이지 어머니의 의식은 그때 이미 요즘 시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나 싶다.


*상록수~ 소설가이자 영화인인 심훈의 장편소설

1935년 동아일보 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으로,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브나로드 운동(농촌계몽운동)을 그린 심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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