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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기억들

지금 내 인생의 봄. 봄. 봄 가운데

by 김별
봄에 태어난 나는 인생 2막의 새봄을 맞이하기 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그간의 삶을 정리해 보려 한다.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이 아니라 그간 나의 삶에서 반짝였거나 기억나는 장면들을 두서없이 써 보려 한다. 내 인생의 연속선 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녔거나 성찰을 불러일으킨 순간들이 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삶도 내적으로는 쉼 없이 일렁이던 순간들이 있었고 그 일렁이는 순간들의 63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상’을 빌리면 나뭇잎 하나도 어제의 나뭇잎이 아니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내 감정도 내가 아니요, 불확실한 내 기억도 생각도 내가 아니다. 그러니 결국 ‘나’라 할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가장 확실하게 보이는 나인 이 몸도 사실은 1년 전의 그 몸이 아니니 말이다.


사람의 뇌와 심장 세포를 제외하면 피부세포는 수명이 28일이요, 그 외 적혈구의 생명은 4 달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세포는 1년이 지나면 새것으로 바뀐다. 그러니 몸으로만 보면 1년 전의 나는 더 이상의 내가 아닌 셈이다. 이런 가운데 ‘나’를 이어온 그 무엇인가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어쩌면 쉼 없이 ‘변화’하여 온 나를 다시 만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내가 나를 기억할 때 가장 아스라한 장면은 보통 사람들에게 최초의 기억이 그러하듯이 네 살 정도일 때다. 그러나 그 기억도 대부분 누군가의 말이나 사진에 근거하여 생성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큰댁에 머물러 계시던 할머니의 말씀으로 나의 최초의 기억을 보관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가끔 작은 아들이었던 우리 집으로 둘러보러 오셨는데 오시면 어린 나는 혼자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고 한다. 교사이셨던 아버지는 출근하시고 어머니도 들에 가셨는지 안 계시니 할머니께서 “00야 혼자서 뭐 하노” 물으셨다. 그러면 나는 “집 본다(지킨다)”라고 대답하니 할머니는 그게 영 기특하셨나 보다. 그래서 그 어린 게 혼자 있으면서 심심하지도 무섭지도 않은지 그리 말했다고 내가 자라면서 두고두고 그 말씀을 하셨다.


내가 열 살까지 살았던 고향마을에 우리 집은 동네의 끝 집이었다. 집 입구에 단감나무가 있었고 작은 개울이 흘렀다. 개울 위 밭 둔덕에 산수유꽃이 피면 봄이 온 걸 알 수 있었다. 집을 나오면 우물이 있었고 우물에서 산 쪽으로 가면 논, 밭이 있고 나지막한 무덤이 있어서 겨울인가 초봄인가 금잔디 위에 앉으면 햇볕이 따스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자라면서 나는 오빠들이 얼음 치기나 스케이트 타기 등을 하면 직접 하기보다 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친구들이랑 어울려 숨바꼭질은 해도 고무줄놀이나 뛰어노는 일은 별로 안 했다. 보통의 그 또래 아이들에 비해 달리고 몸을 움직이는 일은 잘 안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운동회날은 달리다 결승선 앞에서 숨이 차 넘어지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예상이나 했듯이 ‘아이고야 저거 봐라 내 저럴 줄 알았다’ 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키도 작은 데다 몸도 약했고 까무잡잡한 얼굴, 곱슬머리에 쌍꺼풀 눈만 큰 아이였다. 움직이는 것보다는 생각하고 상상하는 걸 더 좋아했다. 그렇게 머릿속 생각이 많아서인 지 혼자 있어도 혼자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물론 동네 또래 친구도 있었지만 네 살 터울 남동생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오빠는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니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기는 많이 했다. 한 번은 친구집에 다 같이 몰려가서 놀았는데 방을 엉망진창으로 해 놓고 다들 우르르 나갔다. 물론 집주인 친구도 뭐가 급한지 나가버렸고 나도 마지막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친구 엄마 얼굴도 떠오르면서 뭔가 께름칙했다. 해서 혼자 빗자루를 들고 방 청소를 해 놓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어느 겨울날, 친구가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군것질 거리를 훔쳤다. 친구가 논이 보이는 한적한 곳에서 벽을 기대고 해바라기 하면서 내게 공물을 나눠주길래 같이 먹었다. 먹으면서 나도 공범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친구 아빠가 술만 먹으면 온 동네가 시끄러웠던 가난하고 불행한 친구였기에 이 정도 훔친 거는 큰 죄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도 훔친 걸 알고도 얻어먹은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보다는 친구에 대한 연민이 더 컸었던 거 같다.


국어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나와 큰집 사촌 5 남매에게 각자 별명을 지어주셨다. 내가 서 너살 정도였을 때 붙여진 별명인데 ‘불 00’이었다. 이유는 동네 친척들이나 아주머니들이 빙 둘러앉아 노실 때 내가 마음에 안 든 상황이 있거나 짜증이 나면 소방서 종이 울리듯 ‘땡땡’ 거리며 갑자기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러면 모두가 나를 집중 해서 쳐다보며 한 마디씩 했고 나는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쳐다보고 반응을 살피고는 안 나오던 눈물도 애써 꽉 짜 내고 울음을 멈추곤했다. 사람들은 놀라서 보다 어린애가 맹랑하다 싶어서 웃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연년생이든 나의 오빠는 억울한 일도 많았다. 몸이 약한 나는 일단 오빠가 조금 인상만 써도 소리를 지르며 우는 시늉을 *시전 하니 부엌에서 달려오신 어머니는 일단 오빠를 나무라셨다. ‘몸도 약하고 신경이 날카로운’ 애라며 그런 동생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좀 예민한 아이였고 그래서 자기 보호 본능적으로 그렇게 했던 거 같다.




환갑이 넘어서야 이런 아주 사소한 것도 돌아보게 되면서 오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오늘 일요일 올케는 교회 가고 혼자 있는 오빠를 생각하면서 무심한 듯 전화해서 이런저런 안부 겸 수다를 떨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 우리 인생 바쁜 일들이 다 휙휙 지나가니 이제서야 나를 돌아보는 그런 여유의 시간이 되었다.


유년의 아련한 기억들은 대부분 겨울자락이 끝나던 때 봄과 맞물려있다. 물론 여름의 왕성한 기운과 복숭아의 맛, 복분자 딸기, 참외 서리에 얽힌 추억도 떠오른다. 하지만 내게는 고요히 생명을 터트리는 봄기운이 먼저 다가온다. 아마도 내가 음력 2월 12일 경칩 즈음 태어나서일 지도 모른다. 애기 손가락같은 버들 강아지 포슬함과 꼬물거리는 생명이 나의 사주팔자 명리학과도 연관된다. 큰 강이 아닌 작은 개울이고 큰 나무 갑목이 아닌 아담한 정원수 같은 을목의 기운이다.



*시전(始展, 施展)하다 (기이하고 신비스러운 동작이나 일 따위를) 펼쳐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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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