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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이야기

부모가 아닌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다

by 김별

대개 사람들은 자식이 부모의 유전과 성향을 닮으니 부모가 자식을 선택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라 믿는다. 오히려 내가 찾아본 바로는, 자식이 부모를 선택해 이 땅에 온다는 것이 맞다.


믿거나 말거나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두 아들에 대한 나의 시선도 달라졌다. 그들의 선택과 결정을 조건 없이 지지하게 되었고, 삶의 방향에서 스스로 선택하도록 기다리는 마음을 배웠다.


자식이 나를 믿고 엄마로 선택했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그들의 삶 속에서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 믿음에 응답하며, 그저 지켜보고 필요할 때만 손을 내밀 줄 알게 되었다.



부모님 이야기


나는 아버지와 특별히 가까운 딸이었다. 아버지는 늘 나의 말에 긍정적인 응원을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근무 학교로 전학을 가 체력장이 있을 때는, 체력이 약한 나를 위해 운동장을 함께 뛰어주셨다. 그 기억이 남아있는 것은, 아버지가 늘 내 곁에서 끝까지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물론 외부에서는 모든 일이 순탄치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외동딸인 나에게만큼은 언제나 든든하고 친근한 존재였다. 부모가 떠난 뒤, 나는 비로소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다’는 말의 무게를 더욱 실감했다.


나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대졸과 무학의 그 학력 차이를 무릅쓰고 얼굴 한번 안 보고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집안 환경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난한 홀어머니 아래 자라셨기에 공부는 거의 장학생으로 마치셨다. 그 후 교사나 부유한 신여성을 만나서 연애도 하셨다.


하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던 아버지는 파마 머리 며느리는 안 본다는 친할머니의 뜻을 따라 외갓집 집안을 아시는 분의 중매로 어머니와 맺어지게 되었다.


내 어릴 적에 내가 모르는 여자분 사진이 앨범에 있어서 누구냐? 고 어머니께 물어보면 어쨌든 승자여서일까? 어머니는 아무런 감정 없이 웃으며 아버지랑 결혼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이런 여자들을 두고 머리에 비녀 꽂고 한복 입은 어머니와 결혼하신 아버지의 인연도 대단하고 어쨌든 나는 그 덕분에 태어났구나 싶었다.


말 타고 처갓집으로 장가 오신 아버지께서 구식 혼례를 올리고 첫날밤을 치른 이야기도 어머니는 어린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 주셨다. 어머니 표현으론 아버지는 ‘깨물어도 비린내 안 날 거 같이 반듯이 생긴’ 미남이셨다고 했다.


그런데 첫날밤 아버지께서 어둠 속에서 어머니 손가락 열 개를 더듬어 보시더라고 했다. 왜 그런가 했는데 나중에 시누이가 사고로 작두에 손가락 마디가 날라 간 걸 보고 아 그래서 그랬구나 했다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손가락은 다 멀쩡한지 확인해 보셨을 테고 큰 기대는 안 하고 장가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초야를 치르고 아침이 밝아 신랑은 신부 얼굴을 보게 되었고 낙담이 되었던지 마당 평상에 홀로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큰 외삼촌이 나가서 위로 겸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좀 마음이 풀렸다고 했다. 어머니 말로는 큰오빠가 면장선거 나갈 정도로 학식과 인품이 있었으니 아버지는 처남 남매 다 골고루 갖춘 집안에서 그래도 어머니가 가정교육은 잘 받았을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풀었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학력은 낮았지만, 그 결점을 충분히 넘는 장점들을 지니고 계셨다. 형제간 우애를 챙기고, 친척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며, 할머니께 효도를 다하는 성실함, 그리고 음식솜씨일 거다.

본인이 입맛이 좋은 데다 손이 부지런하셔서 늘 밥상을 잘 차리시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 동네 간식이 없는데 입이 짧았던 나는 몇 가지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찰밥을 해서 쇠절구에 찧어 인절미를 가끔 해 주셨다. 당시에 떡은 집안에서 해 먹을 수 있는 고급 간식이었던 셈이다. 붉은팥을 푹 삶아 빻아놓고 하얗게 찧은 떡을 길고 둥글게 말아 팥고물을 무친다. 그리고 먹기 좋게 잘라주시면 적당히 달면서도 뜨끈하고 찰져서 맛있었다.

그리고 설날은 쌀, 보리 강정 외에 옥수수 튀긴 것을 조청에 버무려 공처럼 만들어서 우리 삼 남매에게 먹기 좋게 하나씩 쥐어주셨다.


가끔은 쌀가루 반죽을 프라이 팬에 쫘악 펼쳐서 갈색 설탕을 뿌리고 반으로 접으면 어머니표 호떡이 되었다. 달달한 데다 기름향으로 고소하기까지 하니 정말 멋진 특별 간식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시면 손이 넉넉하셔서 내게 쟁반에 담아 동네 한 바퀴도 시키셨다.

입이 심심하던 차에 동네 아줌마들이랑 어르신들이 내가 노란 꿀이 뚝뚝 흐르는 호떡을 갖다 드리면 너무 좋아하셨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의무적인 일도 아닌데 다만 마음이 내켜서 하는 어머니의 특기고 취미 같은 일들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 전 대구로 전학을 오면서, 어린 시절의 모든 풍경과 어머니의 손길, 아버지의 든든한 지원을 잠시 떠나보내야 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늘 부모님의 온기가 남아 있었고, 사춘기의 설렘과 호기심 속에서 나는 자라고 있었다.


우리가 살던 옆방에서는 송창식의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흘러나오고 어정쩡한 폼으로 허수아비처럼 두 팔을 벌리고 노래하는 가수를 보며 나는 선하게 생긴 그 모습에 끌렸다.


우리 반 반장은 얌전한 샌님같이 곱게 생긴 아이였는데 왠지 마음이 설레서 방과 후 누가 그 애 집이 어디라 해서 괜히 그쪽으로 산책하며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아마 사춘기가 시작되려는 시점이었나 보다.

무상 가운데 날마다 자라 가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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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