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등나무 아래에서 1 (5)

두 번의 전학과 한 시절의 향기

by 김별


아버지의 결정과 다시 전학


나는 대구에서 중학생이 되었으니 자연히 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보낼 줄 알았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되자 아버지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나와 오빠를 다시 경북의 학교로 전학시키셨다.


그때는 그저 “아버지가 결정하셨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따랐다.

하지만 훗날 알게 되었다. 오빠가 사춘기 초입에서 기대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자, 부모님 곁에서 다시 천천히 잡아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고등학교 때 다시 대구로 ‘귀환’하게 된다.

인생은 때로, 책장 한 장 넘기는 듯한 작은 이동만으로도 조용히 방향을 틀어놓는다.


무엇보다 내가 부모님과 막내동생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푸근했다.

어린 마음은 언제나 사랑이 가까운 쪽으로, 자연스레 물길처럼 흘러간다.


전학 첫날의 한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다.

등나무 그늘 아래, 펌프식 수돗가에서 친구들이 수군거리던 소리였다.

교무실에서 내 성적표를 보고 나온 듯했다.


“대구 H여중에서 학반 1등으로 왔다더라~”


성적표가 나보다 먼저 전학을 온 셈이었다.

과한 관심이 늘 그렇듯 조금 민망했지만, 시골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시골로 옮겨가는 내 ‘이동 경력’ 속에서 그런 일들은 해프닝처럼 따라붙었다.


다시 시골학교에서 1, 2등을 오가던 그 시절, 특히 수학을 워낙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이과 DNA’를 타고난 존재였고, 나는 ‘암기형 문과 체질’의 전형이었다.

애초에 공정한 승부는 아니었다.


“저 친구는 수학을 이해로 풀고, 나는 집중하면 뭐든 암기로 돌파한다.”

이 소박한 자기평가 덕분인지, 나는 늘 마음이 가벼웠다.


무엇보다 부모님 곁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온하게 했다.

사춘기는 내 안에서 조용히 움트고 있었지만,

정서적으로 나는 여전히 ‘가족 안의 어린 주변인’쯤에 가까웠다.

자아가 막 싹트지만, 아직 세상의 바람이 닿아도 아프지 않은 시절이었다.




기억의 틈 사이로 피어오르는 향취


어머니는 아버지의 점심을 위해 매일 새 밥을 지어 교무실로 가져가셨다.

그 길에 나에게도 갓 지은 밥을 스텐 그릇 뚜껑으로 덮어 두부조림 같은 반찬과 함께 건네주셨다.

친구들이 부러워 한 건, 따끈한 밥 냄새의 그 순한 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은 보온도시락 이전, 양철 도시락의 시대였다.


친구들 도시락 반찬 중 ‘귀다리’라 불린 미역귀가 있었다.

씹으면 쫄깃하고,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입안에 자잘한 파도가 이는 맛.

때로는 도시락을 흔들어 비빔밥을 만들어 나눠 먹기도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런 단순한 맛들이 마음을 오래 살게 한다.


면 단위 마을의 학교는 동해안과 가까웠다.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대본 바닷가까지 걷기도 했는데,

땀이 나도 마음은 시원해지는 거리였다.

그곳은 여름방학 내내 내 작은 세계였다.

Y와, 이제는 기억 속에만 머무는 M, 그리고 내 마음을 흔들던 풋사랑 병태까지—

모두 그 바닷가에서 한 장면씩을 남기고 갔다.


Y는 지금도 말한다.

“그때 네 수영 꽃모자 예뻤어.”

그 말이 이렇게 수십 년 뒤까지 남을 줄 그땐 몰랐다.


우리는 지금도 가끔 말한다.

“골굴암도 가야 하고, 기림사도 가야 하는데…”

하지만 서로의 일정이 꼬이고 삶이 흐르고, 늘 ‘다음에’가 된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엔 언젠가 꼭,

그 바닷가도, Y가 살던 마을도,

그리고 내 마음이 처음 자라나기 시작하던 그 자리도 다시 밟아보리라는 약속이 있다.





함께 기억할 때 비로소 살아나는 조각들


Y는 기억이 유난히 좋은 친구다.

내 기억의 빈틈을 조용히 채워주는—

잃어버린 상자를 열어주는 열쇠 같은 친구다.

서로 다른 조각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겹쳐 보는 ‘10대의 하늘’은 언제나 비슷한 색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풋사랑 병태 이야기까지 Y의 기억에서 다시 피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동창회가 있던 어느 날,

그곳에 내려간 나를 보고 친구들이 말했던 것이다.

“00가 어떤 남자 손잡고 온다!!!”

그 시절 손잡는 일은, 시골마을을 들썩일 만큼 큰 사건이었다.


나는 그저 손만 잡았을 뿐인데,

친구들에겐 그것만으로도 파란이 일었던 모양이다.

Y의 말을 들으며 나는 웃음 반, 뭉클함 반이었다.


기억이란 참 신비롭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조각을

누군가는 묵묵히 품고 있다가

수십 년 뒤 건네주기도 하니까.


이제 예순을 넘기고 나니,

어떤 추억도 허투루 지나치고 싶지 않다.

병태도, 귀다리도, 바닷가도, 따끈한 밥 냄새도—

모두 조용히 돌아와 마음 어딘가 자기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억은,
누군가와 함께 나눌 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 전기밥솥 역사~ 글을 쓰다 궁금해서 전기밥솥에 대해서 찾아봤다.

내가 대학다니던 80년대에도 친구 자취방에 가면 밥을 해서 스텐그릇에 담아 아랫목 담요아래 묻어둔 걸 보았으니!


내가 중학생이던 1975~1977년 전기밥솥은 아직 그리 일반적이지 못했다. 70년대 후반부터 전기밥솥이 상용되었지만 보온, 압력 기능과는 거리가 멀었고 밥이 타기도 했다니 말이다.


지난 일을 적다보니 밥이 주식인 나라에서 밥솥 하나를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정말 급속 성장했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지금 사용하는 쿠쿠 밥솥은 1998년 IMF 이후에 나왔다.


~‘국산 전기밥솥 고발, 23%가 밥 탄다 불만’(동아일보 1983.2.19.), ‘밥 지어지지 않는 전기밥솥’(경향신문 1984.7.16.), 고장 기사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당시 일본에서 만든 ‘코끼리표 전기밥솥’은 밥이 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밥통에 밥을 넣어 놓은 지 3일이 지나도 군내가 나지 않는다니, 하루만 지나도 누렇게 말라버리는 국산 밥통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 손엔 코끼리표 밥통이 한 개씩 들려있었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80년대 중반엔 압력솥이 개발됐다. 사람들은 옛날 가마솥 밥맛이 돌아왔다며 압력솥을 반겼다. 게다가 밥하는 시간도 절반이나 단축돼 고가의 압력솥을 사용하는 이들이 늘었다. 1993년 8월 29일 <한겨레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ㆍ경기지역 여성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밥솥 사용 실태 조사에서 전기밥솥을 사용하는 가구가 62.3%, 압력밥솥 32.7%, 일반 솥이나 냄비 5.1%를 각각 차지하는 것으로 나왔다.
1990년대 중반엔 전기압력밥솥이 출시됐다. 1998년 홈쇼핑에서 전기압력밥솥이 3개월 동안 1만 500개 팔려 전체 상품 중 1위를 차지했다. IMF 여파로 외식 대신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출처 : 인천투데이(https://www.incheon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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