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파도와 아주 오래된 편지들
병태 이야기는 사실, 내게는 “기억의 등나무 아래 2부”쯤 된다.
이미 브런치에도 한 번 적었지만, 자서전에는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내 10대의 향기 속에서 조용히 맴돌다가, 다시 꺼내는 풋사랑 이야기다.
1976년 어느 여름, 아버지가 경북의 학교로 발령을 받으셨다.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나와 오빠는 자연스레 부모님 계신 곳으로 이동했다.
그 여름,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바닷가에서 나는 늘 그랬듯 신나게 살갗을 태우며 놀았다.
아버지는 바다를 좋아하셨고, 우리 가족의 여름은 언제나 “바다 냄새”에서 시작해 “파도 소리”로 끝났다.
그런데 나를 까무잡잡한 얼굴에 곱슬 단발머리로 기억한다는 한 소년이 있었다.
바로 병태였다.
나는 그를 몰랐지만, 그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첫눈에 (요즘 말로) ‘꽂혔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외가댁에 놀러 와 있던 그는 외사촌에게 나를 물었다고 했다.
“누고?”
외사촌 왈,
“국어선생님 딸.”
그렇게 어딘가에서 ‘국어선생님 딸’이었던 내가, 그의 마음속에 살포시 걸린 채 남았던 모양이다.
나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음에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는 대구로 다시 옮겼지만, 병태는 학교 앨범에 적힌 아버지 주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그리하여 그는 편지를 꾸준히 보냈고, 나의 오빠는 그 편지를 꾸준히 숨겼다.
공부에 방해될까 봐.
참으로 심플하고도 한국 오빠다운 논리였다.
그러다 연합고사가 끝난 어느 날, 오빠가 드디어 양심 고백을 했다.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을 툭 올려놓으며 말했다.
“사실… 그동안 몇 통 왔었어. 뜯어봤다. 네가 이제 시험도 끝났으니까 돌려준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이 정도 보호의식이었나?’ 싶다가도, 당시의 분위기라면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오빠가 그토록 중대발표를 한 이유는…
“오늘, 병태가 동대구역에 온단다.”
오빠의 말대로 더는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놀라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고, 상상도 안 해본 일이었고,
무엇보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 기이하다 싶은 마음에, 준비도 대충 하고 동대구역으로 나갔다.
정확한 시각.
쌀쌀한 겨울.
역 앞.
병태는 키가 컸고, 머리칼이 자연스레 연한 갈색빛이 돌았다.
당시엔 염색이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카메라를 메고, 아이보리 터틀넥에 갈색 세무 코트를 입은 모습이 깔끔하고 도시적으로 보였다.
경북 억양에 묻혀 살던 나에게 그 억양은 어쩐지… 도시어였다.
지금 생각하면 세상에나, 내가 부산 말을 ‘도시적’이라고 느끼다니.
하지만 그때 그의 말투는 은근하고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건 부산 사투리의 속성이 아니라 병태라는 사람의 속성이었음을 오래 뒤에야 알았다.
오빠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다방에 데려다 놓고, 그간의 편지 경위를 설명하더니
“니들 잘 얘기해라.” 하고 사라졌다.
나는 어색했지만, 병태는 신기하게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서로 잘 알고 지냈던 친구처럼.
그 후 우린 몇 번 더 만났다.
부산 태종대를 가기도 하고, 그가 대구로 오기도 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 바닷가—병태가 나를 처음 보았던 그곳에 함께 갔던 일이다.
그 자리에 서 있으니, 마치 시간이 데자뷔처럼 나를 감싸고돌았다.
나는 20대부터 “순간에 살자”를 모토로 살아왔다.
Live at the moment.
나에게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는 늘 삶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는 '너무 지금에만 충실했던' 나머지,
어쩌면 잔잔히 이어갈 수도 있던 인연도
칼처럼 끊어버렸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내게 남자친구가 생겼고,
그는 성격이 몹시 보수적이어서 자주 부딪쳤다.
반면 병태는 감성이 비슷했고, 부드럽고,
무엇보다 나와 ‘결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80년대 군사정권하
대학생들도 입학 후 3월,4월 2달간 교련수업을 마치고나면
5월경에 지역소재 군부대에 입소하여 병영집체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남자친구 훈련 배웅하는 날
병태가 연락도 없이 대구로 온 것이다.
나는 복잡한 것을 질색했다.
그래서 그를 다방에 홀로 기다리게 했다가
나중 있는 그대로 말했다.
“ 이제 오지 마.
나 이런 상황 복잡한 거 싫어.”
지금 생각하면 참 지나치게 성급했고, 어설펐다.
그래도 그게 스무 살의 나였다.
칼처럼 단정하고, 복잡함을 싫어하고, 지금의 감정에 충실한.
그 뒤로 병태는 정말로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오래 잊었다가, 나중에야 그 마음의 여진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아지는 것들
그 후 나는 스무 살을 지나,
대가족 외며느리로, 교사로, 외동딸로, 믿음의 사람으로
1인 3~4역을 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그러다 60이 넘어,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그동안 흘려보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오래된 장롱 속 상자를 꺼내
“이런 것도 있었잖아?” 하고 건네주듯이.
그래서 병태 이야기도 이렇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바닷가의 병태, 동대구역의 병태, 달성공원까지 걸어가던 병태—
그 모든 시간들이 지금도 어딘가에 조용히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병태와의 인연은 짧았다.
그러나 짧다고 해서 가벼운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짧은 시간이지만, 긴 그림자를 남긴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것을 천천히 바라볼 마음이 생겼다.
그 시절의 나,
그 시절의 병태,
그 시절의 바닷가와 바람과 파도 소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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