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대가 바뀌는 시기, 숨을 고르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대운(大運)은 십 년 단위로 바뀌는 인생의 큰 흐름을 뜻한다. 그것은 단순히 운이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무대와 배경이 달라지는 시기라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의 사주에서는 그 전환점이 묘하게도 10년 단위로 정확하게 갈라졌다.
나는 1990년 9월 1일 첫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뒤인 2000년 9월 1일, 대구에서 마산으로 옮겼다.
다시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0년 8월 31일, 하루도 어김없이 채운 30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명예퇴직을 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늘 날짜처럼 정확하게 구간을 나누며 흘러왔다.
마산으로 온 지 10년이 되던 2011년 무렵, 나는 더 이상 회색 건물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콘크리트와 창문뿐인 풍경이 숨을 막았다. 대신 초록이 가득한 곳, 시야에 나무와 하늘밖에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내면의 요청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또 하나의 전환점 앞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 교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지만, 솔직히 말해 가장 힘든 담임 업무에서는 한 발 물러나고 싶었다. 특히 사춘기 남학생들이 내뿜는 거친 에너지와, 학급당 몇 명씩 있던 결손가정 아이들의 절박하고 때로는 공격적인 언행은 내게 적지 않은 심리적 부담이 되고 있었다. 교사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었지만, 그 무게가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리산 쪽 시골학교로 전근을 신청했고 그 선택의 바탕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또 다른 생각도 깔려 있었다.
길 떠나는 삶에 대한 오래된 동경
언젠가 인도 구루(Guru)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적 스승인 구루는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계획한다고 했다.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책무를 마친 뒤에는, 세속의 자리에서 물러나 구도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내 삶의 궤적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나는 20대에 결혼했고, 30대에 두 아이를 키우며 가정을 꾸렸으며, 40대에 이르러서는 자녀 양육이라는 큰 책임을 거의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인도의 구루가 오십 무렵 보리수 아래 앉아 구도를 시작하고, 육십이 되어 길 위에서 가르침을 전한다면, 나 역시 인생의 후반부에는 삶의 본질을 향해 조금 더 가벼운 몸으로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내가 존경하던 작가 톨스토이 역시 그렇게 길을 떠났고,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의 삶은 모두 세속적 성취를 넘어, 내면의 자유와 진리에 가까이 가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나는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을 오래 동안 품고 살아왔다. 그래서 삶이 결국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았다.
발은 땅에 붙이고 살되, 지나치게 세속적 부나 명성에 뿌리를 내릴 마음은 없었다. 물질과 모든 관계에 대한 과한 집착은 오히려 영적 탐구를 방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정의 임무가 어느 정도 완성된다면,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삶의 더 본질적인 질문에 머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나는 구루는 아니지만, 적어도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만 내 삶을 다 소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40대에 겪은 종교적 갈등과 탐색 이후, 자연스럽게 이어진 다음 단계였다.
지리산 자락, 숨이 트이다
마침 둘째가 고3이 되었고, 대안학교 특성상 조기 졸업도 가능했다. 두 아이 모두 고등학교를 마치게 되자 심리적 부담이 크게 줄었다. 남편은 처음엔 선뜻 내켜하지 않았지만, 나의 심신 건강을 위해 시골 학교 전근을 이해해 주었다.
나는 특성화고를 선택했다. 학급 수가 적고, 도시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담임 부담이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리산 공기만큼이나 아이들의 심성도 맑았다.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너희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물 좋고 공기 맑은 천국 같은 곳”이라고 말하곤 했다. 야자감독을 피해 주로 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고등학교에 와 보니, 학생들도 한결 성숙해 수업하기가 편했다.
숙소를 구하던 중, 전봇대에 붙은 전세 광고지를 보고 나는 놀랐다. 함양 상림공원 근처 아파트였다. 몇 해 전 학생들과 청학동 연수를 왔을 때, 상림을 거닐며 ‘이런 곳에서 몇 년 살아봐도 좋겠다’고 무심코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게 그때만큼 실감 난 적이 없었다.
상림은 신라 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조성한 천년의 숲이다. 퇴근 후 나는 거의 매일 그곳을 산책했다. 처음 맨발로 숲을 걸을 때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봤지만, 그 시간은 내게 명상이자 치유였다. 상림은 내게 아마존 숲 같은 산소통이 되어주었다.
시골학교의 또 다른 얼굴
학교생활은 미안할 정도로 편안했다. 주요 교과가 비주류가 되다 보니 학생 상담이나 담임 업무는 거의 없었고, 방과 후 영어수업 정도만 맡았다. 그러나 시골학교라고 해서 늘 평온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도시 소년원에서 전학 온 한 학생이 있었다. 유급을 거듭해 나이는 거의 스무 살에 가까웠고, 담배 냄새를 풍기며 교실에 들어서면 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담임을 맡은 여교사는 아이가 두렵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는 전학 업무를 맡고 있어 아이의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피교육자인 학생을 어떻게든 학교에 적응시키고 졸업시켜야 한다고 담임 선생님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심시간, 혼자 밥을 먹는 아이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따로 상담도 했다.
결국 나는 아이에게 검정고시라는 선택지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동생뻘 아이들 사이에서 억지로 버티기보다, 다른 길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정으로 담임도, 반 아이들도 한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굳이 졸업장 하나를 위해 모두가 상처받을 필요는 없었다.
뿌리를 내릴 것인가, 다시 떠날 것인가
시골학교에서의 주말부부 생활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몇 년만 힐링하고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지리산 자락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스무 살에 유학을 떠날 때, 지도교수님은 “아무리 좋아도 5년 안에는 돌아오라”라고 했다. 그 이상 머물면 그 문화가 더 편해져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였다. 그 말처럼 내 후배와 친구는 지금도 프랑스에 남아 살고 있다.
나는 우연처럼 귀국했다가 난 교직 발령과 이어진 결혼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되돌아보면 십 대의 나는 그저 멀리 가고 싶었다. 세계 일주를 꿈꾸며 외국어를 좋아했다.
이십 대에는 유학이라는 꿈을 이뤘고, 삼십 대에는 결혼과 출산, 직장을 모두 경험했다.
사십 대에는 종교와 영성 안에서 치열하게 흔들리며 나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 시간을 보냈다. 불혹이라기보다, 한 차례 크게 뒤집히는 폭풍 같았다.
그리고 마흔의 끝자락, 시골학교로 옮겨온 나는 이제 자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졌다.
*소로처럼, 삶을 단순하게 정리하며 살고 싶었다.
때마침 2016년, 지인이 함양으로 이사 오면서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앞에는 계곡물이 흐르고, 차를 마시며 앉아 있으니 그곳이 진정 무릉도원처럼 느껴졌다. 마침 동네에 빈집이 있다는 지인의 말에 함께 보러 갔고, 나는 하루 만에 집을 사겠다는 결정을 했다.
남편은 전원주택으로는 협소하다며 다른 곳을 보자 했고, 나는 또 덜컥 동네 어귀의 천 평 밭을 샀다. 언젠가 남편이 퇴직하면 넓은 전원주택을 짓고, 지금은 동네에 집을 짓고 살면 되겠다는, 지금 생각하면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선택들이 이후 내 삶을 어디로 데려가게 될지, 또 어떤 질문을 나에게 던지게 될지를.
*소로~미국의 철학자, 시인, 수필가
대표작 《월든 (Walden)》은 월든 호숫가 숲속에서 2년간 자급자족하며 산 기록을 담은 책으로,
자연주의와 간소한 삶의 가치를 강조했다.
《시민 불복종》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국가의 부당한 권력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주장했으며, 이는 후에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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