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있는 집
드디어 시골에 집터와 밭을 샀고,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며 집을 짓는다는 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지만, 남편은 주말마다 내려와 응원을 해 주었다.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파트라는 ‘공중 거처’가 아니라, 마당이 있고 발이 땅에 닿는 집. 태양과 함께 눈을 뜨고, 새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해 해가 지면 자연스레 잠드는 생활. 밤에는 보름달과 별이 더 또렷하고, 저녁 먹고 동네를 한 바퀴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하루 걸음 수는 채워진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먹으며 자급자족의 기쁨도 덤으로 따라온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골 작은 동네에서 산다는 건, 문 하나 닫으면 세상과 분리되는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마당에 꽃을 심었는지, 잡풀이 얼마나 자랐는지, 동네 어른들 눈에는 다 보인다. 풀이 무성하면 지나가던 할머니가 “뱀 나오것다” 한마디 하시고, 눈이 와도 마당을 제때 안 치우면 “사람도 안 사는 집 맹키로”라는 말이 따라온다.
관심과 참견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곳이 시골이다.
그렇게 2017년, 시골 동네 한가운데 이층집을 지었다. 그리고 울타리를 만들고 마당에 꽃도 심고 나무도 심었다. 그런데 그땐 직장이 영원할 것 같았는데, 2020년 명예퇴직을 하고 나니 집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다시 남편이 있는 창원으로 왔고, 우리는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사는 부부가 되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에 선 나는, 한창 전원주택이 로망이던 시절에 집을 지은 셈이다. 몇 번은 팔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전원주택 매물이 넘쳐난다는 말에 마음을 접었다.
그래서 왕복 세 시간이면 먼 거리지만, 이제는 별장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공기 좋은 지리산 자락이 건강에는 최고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파트가 편리성 1번이라면, 전원주택은 단연 건강이 1번이다. 오가는 번거로움에도 막상 오면 좋아서 일주일씩 머물다 가곤 한다.
약간의 폐소공포증과 함께 닫힌 공간이 답답한 나에게, 문을 열면 하늘과 자연이 펼쳐지는 이 집은 꼭 필요한 공간이다.
퇴근하면 함바식당 아줌마
집을 짓는 동안, 나는 공사 인부들의 밥을 직접 해 주었다.
퇴근이 끝나면 마트와 시장을 들러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부터 나는 교사가 아니라 ‘함바식당 아줌마’였다.
도착하면 먼저 쌀부터 씻어 밥솥에 앉히고, 현장을 한 바퀴 돌며 그날의 공정을 확인했다. 남편은 주말에만 오니, 평일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자재도 나르고 밥도 했다. 그렇게 거의 6개월을 살았다. 저녁을 차려 드리고 국과 밥을 넉넉히 남겨두면, 인부들은 숙소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까지 드셨다.
별것 아닌 반찬도 막 해내면 다 맛있었다. 일하고 먹는 밥은 언제나 꿀맛인데다 나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분들을 위해서 나도 정성을 다 해 밥을 지었다.
막걸리 한 사발은 기본이고, 안줏거리가 마땅치 않으면 부추전이라도 꼭 부쳤다. 대부분 충청도 분들이신데 동태탕을 멀겋게 끓였다가 “이건 국이지 탕이 아니다” 퇴짜 맞고, 다시 두부 듬뿍 넣어 자작하게 끓였더니 그제야 웃으며 “이제 제대로네” 하셨다.
그 이야기를 글로 썼더니, ‘퇴근하면 함바 아줌마’라는 제목으로 꽤 큰 반응을 얻었다. 글 조회수가 지금 다시 보니 86,000회다. 당시 무슨 잭팟 터지듯 딸랑딸랑 알람이 떴는데 그게 다음 메인화면에 떴다는 소리인 건 나중에 알았다. 암튼 그런 잭팟이 서너번 터지면서 구독자수가 팡팡 늘어나니 참 재미나던 브런치 초기 시절이었다.
집 오프닝, 동네 잔치가 되다
집을 짓고 처음 2~3년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지인들도 불러 하루 이틀 묵게 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이층 생활공간과 분리된 카페형 거실 덕분이었다. 평소에도 집에서 카페처럼 커피를 마실 수 있었고, 남편은 홈시어터처럼 꾸며 영화를 보거나, 연말이면 이웃들을 모셔 노래까지 부를 수 있게 했다.
공사는 겨울에 시작해 2월에 기둥을 세우며 급물살을 탔고, 외장 공사에 들어서자 속도가 느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2017년 7월 15일, 집 오프닝을 했다. 소문을 듣고 동네 분들, 지인들이 모였다. 벨리댄스, 비보이, 살풀이춤, 기타와 포크송까지—집 완공을 축하하는 작은 공연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감사했던 건 동네 분들이었다.
공사 소음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헌 집 헐고 새 동네 만들어준다”며 오히려 반겨주셨다.
오프닝 날 음식도 부녀회장님과 반장님이 도맡아 해 주셨다. 손 많이 가는 잡채, 나물, 전, 김치까지 그날은 진짜 동네 잔치였다.
먼저 들어와 사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언제나 기존 동네 분들에게 먼저 잘하고 싶었다. 노모당에 간식도 챙겨드리며 지내다 보니, 이웃과의 정도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렇게 나의 시골살이는 잘 정착해갔다.
고사리 아줌마와 오미자 농부의 탄생
부녀회장님께서 쓰시던 천평 오미자밭을 샀는데, 그 둔덕에 고사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릴 적 산에서 몇 개 따 보던 고사리를, 밭 둔덕에서 만나다니. 비 오고 나면 아기 손가락처럼 연한 고사리가 쑥쑥 올라왔다.
첫해엔 양이 정말 많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고사리를 꺾어 데쳐 널어놓고 출근했다. 그렇게 말린 고사리를 친정과 시댁, 고모들께 나눠드리니 다들 “지리산 고사리”라며 좋아하셨다. 집 짓는 동안엔 고사리 육개장, 고사리 두루치기로 인부들 밥상도 풍성해졌다. 몇 해 동안 나는 꺾는 재미, 나누는 재미를 다 누렸다. 내 인생의 고사리 황금기였다.
9월이 되자 빨간 오미자가 주렁주렁 열렸지만, 풀밭이 되어버린 밭은 정글 같았다. 서울에 있던 두 아들을 불러 “낫으로라도 좀 정리해라” 했더니,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이건 개망초가 아니라 개망목이야.”
내 키보다 큰 풀을 며칠 베더니, “서울에서 알바 100개 하는 게 이거보다 덜 힘들겠다”며 도망갔다.
오미자 따기도 만만치 않았다.
부녀회장님 말씀대로, 화장실에 가서 옷을 벗으면 옷 속에 숨어 있던 이파리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수확량은 예전의 절반도 안 됐지만, 거의 무농약이라 지인들이 많이 사 주었다. 전원생활 첫 오미자수확으로 나는 유치한 문구까지 만들어 오미자를 팔았다.
~약 안 쳐서 모양은 떨어져도 더 건강한 오미자입니다.
봄바람과 한여름 햇살, 장대비를 먹고 자란
지리산 해발 400m 오미자.
우리 인생도 오미자처럼
단맛·짠맛·쓴맛·매운맛·신맛
골고 맛보면 더 깊어지지 않을까요?
그 집과 그 밭,
그 시간은
내 삶에 뿌리를 내리게 해 준,
참 고마운 시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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