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직장, 출산, 그리고 명퇴에 이르기까지
준비해서 맞이했다기보다, 때가 되자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점점 인생은 의지가 아니라 타이밍에 의해 열리는 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퇴직도 그에 따라 일어났기에 이제 나의 남은 시간 또한, 모든 건 때를 따라
그렇게 펼쳐갈 것이라 여기며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사람이 자신이 원하고 뜻하는 바를 노력은 하지않고 그냥 시간만 흘려보내면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방향으로 키를 잡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가되 결과는 항상 모든 보이지않는 인과관계가 얽히고 섥히다 마침내 임계치가 차는 그 순간에 일어나게 될 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타이밍을 잘 모르는 것은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와서 어느 순간에 일으킬 지 모르기 때문인데 몇 번 겪고 나면 영적 촉각에 예민해져 그에 자연스레 반응하게 된다.
사람이 두 눈 부릅뜨고 본다고는 하나 사실은 정면조차도 45도 각도로만 정확히 보고 옆도 뒤도 볼 수 없는 존재 아닌가? 그러니 뭐라 더 말하겠는가?
인간은 자기 운명의 개척자라고나 하나 자신의 노력과 열정뒤에 숨어 바람을 보내 밀어주는 신의 손길이나 위에서 전체적 조망으로 다 내려다보고 적시에 내 눈앞에 딱 데려다놓는 섭리와 같은 신성한 간섭이나 중재에 대해선 잘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전원주택을 짓고 난 뒤, 나는 집과 읍내 학교를 오가며 비교적 안정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텅 빈 교무실에 앉아 계시던 교감선생님과 마주쳤다.
별 뜻 없는 안부와 인사 끝에 그분이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선생님은 내년에 퇴직하실 거죠?”
나는 이듬해 명예퇴직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런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오며,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 갑자기 스쳤다.
내년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이구나.
1학기 말에 퇴직해도 근속 30년은 채워진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또렷해졌다.
그날이 마침 명퇴 신청 마감일이었다.
점심을 서둘러 먹고 서류를 준비하겠다고 하자, 교감선생님은 몹시 놀라셨다.
혹시 자신의 말이 퇴직을 종용한 것처럼 들렸을까 봐 몇 번이나 되묻기도 하셨다.
나는 웃으며 반년 빠르든 늦든 큰 차이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해야 할 것 같았다고만 말씀드렸다.
교장실에서도 반응은 비슷했다.
“결재 안 해줄까 봐 마지막 날 이렇게 퇴근시간 직전에 쳐들어왔냐”는 농담까지 들으며,
나는 사전에 말씀드리지 못한 점을 사과하고 조용히 결재를 받았다.
그때는 몰랐다.
왜 하필 그날, 그렇게 서둘러 반년을 앞당겼는지를.
명예퇴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머니를 모셔오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 반년이, 아니 그 몇 달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를.
지금 돌아보면, 그 결정은 계산이 아니라
나에게 온 촉으로 내게 주어진 타이밍을 따라간 나의 옳은 판단이었다.
학기 중간인 1학기 말에 퇴직을 하다 보니, 공식적인 환송식은 어중간해졌다.
학교에서는 간단한 식사라도 하자 했지만,
2020년 여름은 아직 코로나로 인원 제한이 엄격하던 시기였다.
참석 희망자를 받아보니 교무실은 물론 행정실, 조리사 선생님들까지 전원이 참여하겠다고 하자
결국 식당 예약은 불가능했고, 가사준비실에서 소박한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코로나 시절 퇴직하던 경우는 보통 인원제한 내 식당예약을 했던 터라
교장선생님은 직원들 사이 내 인기가 그렇게 하늘을 찌르는 줄은 몰랐다며 또 웃었다.
나는 학교에서 따로 준비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학교 일정에 폐 끼치지 않고 조용히 떠나게 해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래도 선생님들은 풍선, 케이크, 회와 떡 과일, 피자, 치킨등 푸짐하게 준비해 주셨다.
여교사회에서는 따로 꽃다발과 선물도 챙겨주었다.
아직도 마스크를 쓴 아이들과 동료들을 남겨두고
그렇게 황망히 나만 먼저 빠져나오는 것 같아
시원함보다 미안함이 더 컸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수업들어가는 아이들에게는 간식과 함께 마지막 인사를 일일히 학급에서 했다.
퇴직 후 숨 고를 틈도 없이, 추석 무렵 나는 친정어머니를 시골집으로 모셔왔다.
여름방학에 찾아뵈었을 때 급격히 쇠약해지셔서
요양병원에 한 달 계시다 결국 내가 모시게 된 것이다.
짧았지만, 그 시간은 내가 시골에 집을 지으며 얻은 가장 큰 보람이며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이때의 마음을 나는 일기에 남겨두었다.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
어머니와 함께한 지 두 달이 넘어간다.
어머니 돌봄은 하루 종일 이어지는 일이다.
처음엔 대소변 처리와 세 끼 식사 챙기느라 나도 허둥댔다.
다섯 주쯤 지나니 요령이 생기고, 무엇보다 어머니 입맛이 돌아온 것이 다행이다.
지금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하다.
요양병원에서 면회조차 못 하던 답답함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행복한 시간이다.
노년의 예민함과 고마움, 불평과 애정이 오가는 감정의 진폭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내 딸 내 효녀딸아 하시다가도 짜증이 폭발하면 내가 너를 수십년 키웠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이셨다. 그를 듣는 나도 힘들지만 어머니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 무너지고 사그라드니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인생무상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황금빛이던 은행잎이
하루 사이에 모두 떨어져 허허롭게 서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일찍 명퇴하고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 내 인생의 ‘신의 한 수’다.
어머니는 몇 달을 나와 지내시다 병원과 요양원을 거쳐
2021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소천하셨다.
(어쩌면 날짜를 제대로 못 챙기는 나를 위해 날짜조차 그리 맞춰 가셨을까 싶다.
지금 우리 삼남매는 어버이날에 군위 카톨릭 묘지를 함께 참배한다)
그날, 우리는 카네이션을 만져드리고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하고 돌아왔다.
말씀은 없으셨지만,
눈가의 떨림과 손끝의 움직임으로
나는 어머니가 모두 알아들으셨음을 알았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때
아직 말씀을 하실 수 있을 때 내게 한 마지막 말은 또렷했다.
“니는 할 만큼 했다. 산이 강이 데리고 잘 살아라.”
지나고 보니 그렇게 지상의 옷을 벗으며
끝까지 내 마음을 놓아주려 하신 말이었다.
나는 늘 말해왔다.
부모에게 천분지 일을 돌려드리는 것은 효가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의 의리일 뿐이라고.
그 의리를 조금이나마 다했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나와 이웃을 함께 사랑하며
인생 2막을 차분히 채워가고 싶다.
아이들에게 남길 재산은 없고, 남기고 싶지도 않다.
다만 부모가 살아온 모습을 보고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인생은 여전히 계획보다 타이밍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타이밍을 믿고 여여히 살아가려 한다.
* 자서전 이 파트는 내 브런치북 5도2촌 전원일기에 써 둔 글을 간략하게 줄여 올렸다.
https://brunch.co.kr/@c3e689f797bd432/189
https://brunch.co.kr/@c3e689f797bd432/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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