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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Nov 07. 2023

지리산중별곡~어머니와 가을


내가 시골에 집 지어서 가장 큰 효도는 친정어머니의 마지막을 내 집에서 모실 수 있었던 거였다.

      

나는 20년 8월 말 30년간의 교사생활을 마감했다. 9 to 5의 출퇴근 생활을 졸업하고 나니 얼마나 시원하던 지! 9월은 바쁘게 집안 정리랑 오미자 농사일을 서둘러 해치워놓고 잠시 숨 고르기로 제주여행 다녀왔다.

그리고 여행 다녀오자마자 추석 때 친정어머니를 모셔 와서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 계획했던 거보다 반년을 앞당겨 명퇴를 한 것도 지나고 보니 어머니와 나의 시간을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머니와 함께 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어간다.


어머니 돌보는 일은 잠자는 시간, 낮잠 주무시는 시간 빼면 24시간은 아니지만 거의 하루 온종일 근무인 셈이다. 처음 1-2 주는 대소변 처리와 세끼 식사 시간 때 맞춰 상 차리기로 나도 허둥대며 적응하느라 바빴다.

이제 5주가 지나니 조금 요령도 생기고 나도 안정이 되어간다.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입맛을 되찾아 드시는 게 수월해진 것이 다행스럽고 나도 몸은 힘드나 마음은 편하다.      


요양병원에 계실 때 코로나로 면회도 안 되는 깜깜이 상황에서 답답해하며 애태우던 마음고생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하겠다.

      

노인이 되면 몸 마음이 다 어린애가 된다는 건 크게는 신체적 조건 때문인 거 같다.

의식은 멀쩡한데 내 몸 내 맘대로 못 쓰니 그 심정이 오죽하랴. 그래서 성급하고 예민해지기도 하고 고마워도 하다 불평도 하다 감정의 기복이 크다.      

어떨 때는 내 딸 심청아 하시며 너 같은 딸 하나만 더 있어도 좋겠다 하시다가도 또 어떨 때는 내가 너를 낳아 수 십 년을 키웠는데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해주냐? 며 짜증을 내신다.


원래 어머니 성품이 그리 직언을 하시고 단순한 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양가적 감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컨디션이 좋을 때와 아닐 때 드는 기분의 격차로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감정이다.


인생무상이다.

그제 산책 때 그렇게 황금빛을 자랑하던 은행잎들이 어제 찬바람에 이파리를 다 떨구고 그냥 허허롭게 서 있다. 그래서 어머니와도 얼마라고 기약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그저 다행스럽고 감사할 뿐이다.      


주중엔 이층 집에서 딸이랑만 있다가 주말이면 막내아들도 오고 사위도 와서 아래층으로 업고 내려갈 수 있으니 바깥바람을 쐬신다.

데크에 내려가 함께 햇볕도 쪼이고 연못 물고기도 보고 나랑 동네 한 바퀴도 하고 공원에 산책도 가신다. 낮밤도 없이 누워서만 지내던 요양병원이랑은 비교도 안 된다며 좋아하신다.      


내가 직장을 조금이라도 일찍 명퇴를 하고 이렇게 어머니랑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은 그저 내 인생에 ‘신의 한 수’라며 나는 거듭 감사할 뿐이었다.




나는 인생은 각자의 영혼 성장을 목적으로 모든 환경설정을 해서 오는 삶의 무대라 본다.

그 가운데 나의 어머니는 성격도 독특하시며 이제 나와 이렇게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하게 되니 정말 나에게 어머니는 모녀의 인연 못지않게 내 인생에서 귀인이시다.      


며칠 전 자기 전 어머니와 나의 인연에 대해서 잠시 명상을 하는데 해수 관음상이 떠올랐다. 어머니 살 빠지기 전에는 부처님상이셨다. 물론 종교는 성당을 주로 다니셨지만 종교란 것도 알고 보면 피상적 껍질일 뿐이며 심층적 본질적으로는 다 하나로 본다. 어머니 젊은 시절 사진을 본 어느 지인이 둔황석굴의 보살상을 닮았다고도 하셨다. 아마도 얼굴의 둥근 선과 자애로움이 그러할 지도 모르겠다.


젊은시절 두 분 모습


그래서 아침 식사를 챙겨드리면서 어머니는 산과 바다 중 어디가 더 좋으냐? 하니 단연코 ‘바다’ 하신다 ㅎㅎ

여름방학이면 그렇게 바다 가는 걸 즐기시고 아버지와도 우리와도 바다 가기를 좋아하셨다. 친정아버지 돌아가신 후로 여름 방학만 다가오면 내게 언제 올 거냐고 날짜를 묻고 동해안으로 같이 가서 바닷가에 텐트 치고 놀다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일남 팔 녀 외며느리에다 그때는 교회까지 다니던 내가 시간이 안 되어 동행을  해드리면 혼자서도 배낭을 메고 민박을 하며 용감하게 떠나셨을 정도로 바다 바람 쐬기를 좋아하셨던 어머니시다. 낙천적인 성격에 '죽어지면 썩어질 몸 뭐 하러 아끼냐'며 부지런하셨고 시집 친정 양가로 다 베풀기도 잘하셨다.    

  

나는 지금 어머니를 통해 관세음보살을 배우고 있다. 어머니의 칭찬과 감사, 그리고 함께 잔소리, 비난, 불평, 지적질도 들으며 그를(世音) 통해 알아차림 하고 본다(觀).     


그런 어머니는 보리살타 보살심으로 꽃 같은 아름다운 순수한 마음을 가지셨는지 꽃을 무척 좋아하셨다.

 가을이면 유난히 국화향기를 좋아하셔서 이미 국화가 철이 지났는데도 국화 화분이 있으면 사 오라고 전화를 하셨다. 나는 몇 군데 꽃집을 들러봤지만 없어서 이제 국화가 다 끝나버렸네~하고 말았다.      


그런데 막내동생은 전국을 인터넷으로 뒤져서 수배를 했는지 어머니집으로 국화 화분을 배달시켰다. 역쉬 어머니말씀데로 ‘쟤는 마음이 천심이다’ 하듯이 동생은 타고난 효자였다. 나는 그저 머리로 먼저 이해하고 가슴이 동해야 움직이는데....     


그렇게 국향을 좋아하셨던 내 어머니, 올해도 내 고향 남쪽바다 마산 국화축제가 바로 우리 아파트 앞에서 하고 있으니 대 여섯 번을 내려갔는데 갈 때마다 국화를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다시 무상하다. 그렇게 입맛도 좋으시고 감성 충만하셔서 좋은 건 좋다, 아닌 건 아니다 선이 확실했던 우리 엄마,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좋아하셨던 꽃을 실컷 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국화축제 꽃 10 만송이를 보면 어머니 계신 하늘나라에서 어쩌면 꽃향기를 맡고 계실까 하며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난다.     


지리산집  동네 노랑 은행나무를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꽃을 워낙 좋아하셔서 집안 안팎의 꽃들을 꺽어다 놓고 국화화분도 사다 어머니 침대 옆에 놓아드렸다
더 이상의 생신상을 차려드릴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남편과 남동생이 모시고 공원으로 바람 쐬러 간 날
어머니께서 주로 머무셨던 이층 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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