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는 일과 나누는 일 사이에서
나는 공기 좋은 곳에 내려와 둥지를 틀면
삶도 조용히 흘러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골은 고요한 만큼, 쉽게 흔들렸다.
집을 짓고 몇 해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함양에서 인월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홍두깨에
공장 굴뚝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았다.
황급히 올라가 보니 이미 소나무들이 베어져 있었고,
땅은 깊게 파여 있었다.
우리 마을 위쪽의 ○○공장이
대규모 확장 공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실제적인 주민 설명회는 없었고,
형식적인 서류만 통과된 채 공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베어낸 나무 사이로 흘러내린 토사는
아랫마을 개천을 탁하게 만들었다.
나와 우리마을 몇 사람은 아랫마을 이장들과 함께 움직였다.
나는 분노했다.
그리고 평생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일을 시작했다.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환경운동이었다.
근 일 년 동안 시위에 참여했고,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전단지를 만들어 직접 돌렸다.
땡볕 아래 군청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고,
차량 시위에도 줄을 섰다.
삭발만 하지 않았을 뿐,
마음의 결기는 그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군청 공무원과 공장 간부들을 마주 앉혔다.
공사는 지연되었고,
공기와 수질을 오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환경 설비를 갖추고,
공기오염 측정기를 설치해 감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공기와 물은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삶이었다.
환경운동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땅이 좁은 나라에서 사람들은
시골을 쓰레기장 유치등으로 각종폐기물을
‘버려도 되는 곳’으로 여긴다.
이제 기업은 사익 이전에
환경과 사람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지속 가능성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골의 얼굴이
늘 싸움만은 아니었다.
마을에는 여전히 나눔이 남아 있었다.
내가 병원에 갈 때도,
아들이 결혼할 때도
이웃들은 말없이 마음을 보탰다.
나는 그 인심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고마웠다.
서울에서 열흘을 보내고
마산으로 내려오는 길에
함양 시골집에 잠시 들렀다.
우리는 이제 5도 2촌으로 산다.
겨울의 시골집은 느리다.
보일러를 하루는 돌려야 온기가 돈다.
그날은 아래층 거실을 온풍기로 데우고
작은 찻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홍시가 된 대봉감을 들고
노모당에 들렀다.
부녀회장님과 몇 분이 계셨다.
“올해 감 농사 안 됐는데 귀하다”며
기뻐하신다.
커피는 이미 마셨다 해도
보리차를, 고구마를 내주신다.
시골의 주고받음은 계산이 없다.
예전부터 그래왔고,
그게 규칙이다.
돌아오며 남편에게 말했다.
“동지 팥죽 먹으러는 꼭 내려오자.”
작년 동지가 떠올랐다.
눈에 갇혀 일주일을 버티던 때,
노모당에서 팥죽 먹으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할머니들은 새벽부터 쌀을 불리고
팥을 삶아 두 솥의 팥죽을 끓이셨다.
진짜 팥죽이었다.
두 그릇을 먹고,
두 그릇을 더 얻어왔다.
그날 내 영혼까지 배부른 느낌이었다.
시골집 1층 거실에는
몇 년째 같은 자리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다.
버리지 못한 채 계절을 넘겼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따뜻해진다.
농사의 시간표처럼
이제는 멈추고 쉬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눈에 갇힌 어느 크리스마스,
동네 할머니들과 언니, 오빠들을 초대했다.
성탄절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파스타와 와인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은 닭볶음탕, 어묵탕, 막걸리였다.
젓가락 장단에 웃음이 섞였다.
부녀회장님의 18번은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었다.
나는 그 노래가 들릴 때마다
불평등한 삶에 대한
억울함에 마음이 저린다.
그러나 그분은 구슬프게,
아주 잘 부르신다.
그 시절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던 시대였을 것이다.
시골은 한 얼굴이 아니다.
지켜야 할 때는 싸워야 했고,
살아가려면 나누어야 했다.
나는 그 두 가지를
이곳에서 동시에 배웠다.
https://brunch.co.kr/@c3e689f797bd432/213
https://brunch.co.kr/@c3e689f797bd432/214
#자서전 #자전적에세이 #시골집 #동지팥죽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파티 #5도2촌 #환경 #환경운동 #군청 #시위 #차량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