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4일
드뎌 룸메 D샘이 도착했다!
사람도 시절 인연이라 서로 여행이 인연이 되어 처음 만나서 우린 보름을 함께 하게 되었다.
D샘은 내가 먼저 여행 떠나오기 전 우리 집에 와서 차 한잔하고 이곳에서 접선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해서 D샘은 몽골에 이틀 늦게 도착했고 두 사람이 보름 동안 환상의 짝꿍이 되었다.
나이야 한 살 차이지만 서로 마음결이 비슷한 데다 살아온 경험 이야기를 하면 통하는 점이 많아 밖에서 함께 구경하고 다니다 돌아와 숙소에서는 살아온 이야기보따리 펼치고 듣느라 넘 흥미롭고도 재미있었다.
나는 '여행은 사람'이라 보기에 현지인이든 룸메이트든
이렇게 사람 만나 듣는 이야기 또한 내 여행의 참 맛이요 의미라 본다.
D 샘이랑 칭기즈칸 호텔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환전하러 몽골국립백화점에 갔다.
국립 백화점이라 하나 흔히 백화점 하면 떠올리는 화려하고 세련된 고가품이나 브랜드 상품등은 없다. 오히려 이나라 민속적 옷이나 그림, 장신구들이 있어서 보는 우리는 더 흥미롭고 즐거웠다. 그곳에서 자주색 붉은 염색이 된 가죽배낭을 샀는데 수 놓인 문양이 몽골스러우면서도 이뻐서 마음에 들었다. 룸메 선생님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도 있어서 사 먹고 몽골의 특산품인 캐시미어 가게도 둘러보며 나는 며느리 줄 숄을 사고 룸메선생님은 모자를 샀다.
여행지에서 쇼핑의 즐거움은 남다르다. 이곳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그렇고 또 돌아와서는 그를 보며 다시 그곳 여행지를 떠 올릴 수 있어 좋기 때문이리라.
백화점에서 나와 거기서부터는 내가 전 날 혼자 네비도 안 켜고 동물적 감각인 촉으로만 따라 찾아갔던 수호바타르 광장을 이번엔 구글지도를 켜고 찾아갔다. 길이 비교적 쭈욱 한 도로 일직선상으로 진행되기에서 찾기도 쉬웠다.
평소 내 여행 루틴방식은 일단 숙소에서 먼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가서 거기서부터 하나씩 보면서 뚜벅이로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올 때 거리가 멀면 택시를 타고 아니면 걸어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걷기와 택시 타기나 버스등 대중교통을 두루 사용하는 편인데 울란바토르 시내에서는 어플택시를 몇 번 타고 많이 걸어 다녔다.
전날 갔을 적에는 광장이 울란바토르 국제대학의 졸업식으로 엄청 북적였는데 다시 가니 비교적 한산했다.
여기서 잠깐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전날 졸업 사진 촬영 때도 온통 화장 짙게 하고 잘 차려입은 여학생들만 눈에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몽골은 여대생 진학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대략 6대 4로 여학생들이 진학률이 높은 게 다소 의외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교육열도 높고 약간의 모계 사회적 경향도 있는 듯하다. 그래서 실제로 결혼할 때 여자의 학벌이 남자보다 높은 예가 많다 한다.
내가 어느 학교 졸업식이냐고 물으니 졸업장을 보여준 여학생, 실제 일부 이공대에도 여성이 다수라 한다.
아마 전통적으로도 남자들은 7세부터 말을 타고 유목일을 배우니 집안일을 하던 여자들이 학교에 다닐 시간이 더 많지 않았겠나 싶다.
2020년 통계치로 몽골 여성들 3명 중 1명은 대졸이다. 이러니 집안에서도 중요 사항을 결정할 때 여성의 영향력이 크다. 지금 몽골은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몽골 휴일로 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그 옛날 약탈혼이 이뤄지던 몽골여성들의 지위가 이제는 주변국 사회주의 러시아나 그들의 종교, 그리고 시대적 영향으로 놀라울 정도로 엄청 많이 변화하고 상승한 것이라 본다.
1990년대 중반 몽골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간 한 언론인이 '아내를 빌려주는 나라'라는 요상한 제목으로 책을 낸 적이 있었다. 책 판매를 위해 선정적인 제목을 취했는지는 몰라도 이전에는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던 몽골인들이 이 불쾌한 제목의 책으로 인해 그곳에 거주하던 한인 교포들까지 상당한 곤란과 어려움을 겪었다 한다. 글로서 저지른 한 사람의 무책임 무분별한 행동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아마도 고비 사막과 같은 척박한 곳에서 남편 없이 살던 과부가 지나가던 객과 잠자리를 하여 어떻게든 아이를 낳고자 했던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설이 있긴 하다.
몽골 화폐 투그릭에는 거의가 모두 칭기즈칸의 얼굴인데 유일하게 한 사람이 더 있다. 그래서 첨엔 이 사람이 누구일까? 했는데 바로 광장 이름과 광장 동상의 주인공인 수흐바트로였다.
그는 1893년 몽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시장에서 고기와 땔감을 나르는 등 어려운 삶을 살았다. 그 시절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관은 라마 사원이 전부였기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 보냈다.
19세 때 군 복무를 위해 동원되었던 그는 1912년 중국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후 1921년 7월, 그는 그가 이끄는 인민군을 데리고 울란바토르를 습격하여 중국군을 몰아내고 몽골의 수도를 되찾았다. 그로 인해 몽골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으며 그는 사람들로부터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그런 그가 돌연 28세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자세한 사망 원인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울란바토르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사람들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걸 보고 러시아군 수를 줄이자는 제안을 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군에 의해 독살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광장은 그의 죽음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해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허브로서 만남의 장소요 행사의 중심지며 모든 장소로 통하는 길이 있는 이 광장을 사람들은 더 친숙하게 여전히 칭기즈칸 광장으로 부르고 있다. 구 소련체제하에서는 칭기즈칸이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었는데 행여 몽골 민족주의의 부활을 우려해서였다 한다.
그러나 이제 마음 놓고 이들은 칭기즈칸이라 하며 넓디넓은 광장의 중앙에 1946년에 제작된 수호바타르 동상이 우뚝 서 있고 북쪽으로는 칭기즈칸 동상이 앉아있는데 이 두 인물이 아마도 몽골인의 자긍심과 정체성의 중심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칭기즈칸 동상 뒤편으로 대통령실과 총리실등 정부청사와 국회가 있다.
광장을 둘러보고 나서 내가 가장 궁금한 곳 초이진 라마 사원을 찾아 나섰다. 전날도 근처까지 갔다가 못 찾아 배도 고파서 샹그릴라 쇼핑몰에서 끼니를 때우고 돌아왔는데 오늘은 D샘이랑 함께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결국 근처까지 가서 또 빙빙 돌다 지나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우리가 이미 지나쳐 왔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니 전 날 내가 헤매었던 샹그릴라 호텔 바로 맞은편이었다.
태국 방콕에서도 마천루 빌딩 옆에 자리한 절을 봤지만
이 오래된 라마 사원도 울란바토로의 샹그릴라 호텔과
화려한 쇼핑몰 바로 옆이란 게 새삼 또 낯설다.
입구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험상궂은 사천왕 같은 상들이 우릴 맞이하고 탈 바가지 같은 가면들이 엄청 많은데 대부분 작은 해골 모형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그 섬뜩한 모습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심을 표현한 거겠지만 죽음과 삶이 결코 무관한 게 아님을 말하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사람이 노화와 병을 두려워하는 것도 결국은 생. 노병. 사 절차의 그 마지막인 죽음을 두려워함이니 그를 초극 내지 초월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몽골 전통 건축양식을 따라 지어진 사원은 바로 옆의 현대적 건물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고 이제는 사원이라기보다는 박물관 기능을 하는 이곳은 많은 몽골 전통 미술과 고고학적 유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라마교는 티베트 불교의 한 형태로, 주로 티베트와 몽골 지역에서 널리 퍼졌는데 이 종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왕들과 국가의 지지를 받았다.
수도를 카라코롬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나라명을 원이라 칭하고 황제가 된 쿠빌라이, 그는 역대 중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1월 1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되면서 각종 국가의식을 담당할 종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껏 몽골제국이 사용해 오던 샤머니즘 무당들의 굿은 이제는 대원제국인 나라의 권위와 맞지 않다고 보고 다른 유력한 종교들을 두루 찾아 둘러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슬람, 가톨릭, 불교등 여러 종파 지도자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였고 그중에서 티베트 불교 즉 라마교를 선택해서 국교로 삼고 라마승들에게 국가 제사 및 각종 행사를 담당하게 했다.
이때 쿠빌라이가 티베트불교의 가장 높은 승려에게 달라이라마(바다와 같이 큰 스님)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렇게 정치적 선택으로 이뤄진 종교를 보면 또 한 왕이 떠오르는데 바로 기독교를 로마국교로 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다. 그에게 기독교는 신앙이기 전에 우선은 정치적 선택이었을 수 있었던 거처럼 티베트불교 라마교가 원나라에 들어온 배경도 그와 비슷하지 않겠나 싶었다.
어찌 되었든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이끄는 철학과 종교는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충효사상을 강조했던 우리나라의 유교가 좋은 예다. 인간의 기본도리를 강조하면서도 군신유의등 개인보다도 국가에 대한 도리나 국가관등을 강조한 면이 많다.
특히 종교는 사후세계인 사람들의 내세관까지 지배하고 통제하기에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종교가 국가적 행사인 '의식'儀式 을 행할 뿐 아니라 백성들의 '의식'意識 을 지배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본다.
왕실의 지지를 받던 라마교는 원나라가 망하자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 17세기에 무속을 신봉하던 민간인을 대상으로 라마교가 전 몽골로 전파됨으로써 다시 되살아났다. 그리고 청나라 지배기간 동안은 제정일체의 신정정치가 되어 라마가 왕이 되는 라마왕 '보그드한'이 몽골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보그드한 라마왕에게 부인을 두게 했는데 이는 몽골 민중이 종교를 중심으로 하나로 단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국이 라마왕에게 부인을 두게 해서 몽골 국교인 티베트불교를 고의적으로 혼탁하게 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마치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나라 스님들에게 부인을 두게 하는 대처승제도를 실행케 한 것과 같은 맥락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처승 對妻僧은 살림을 차리고 처(妻)와 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승려를 일컫는 말인데 일본 불교에서 왔다. 원래 조선 시대에는 승려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불법으로 여기고 만일 승려가 결혼하여 부인과 함께 살면 환속시키는 것을 법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6년 말 총독부가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승려들에게 대처와 육식 먹는 것을 승인한 것은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이 크게 늘어났고 이에 따라 해방 무렵에는 전체 불교계에 결혼한 대처승이 결혼하지 않은 비구승보다 더 많아졌다. 이에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처승은 일본 제국의 잔재이므로 모두 물러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라마(Lama)란 말 뜻은 티베트어로 "영혼의 선생님"이라는 의미다. 티베트 불교에서 승려들이 지도자나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 라마승려들은 지식, 도덕,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습 경험을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수하고 정신적 도움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라마들은 이 땅에서 높은 도덕과 수행을 잘 이루어내면 여러 생에 걸쳐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 승려 생활을 이어가는 것으로 믿고 있다.
사원 내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은 인터넷에서
그리고 이 섬찟한 탈 곁에 라마교는 티베트의 영향인지 밀교 카마수트라 같은 쇼킹 하며 선정적인 형상도 버젓이 같이 자리하고 있어서 참 아이러니하게도 여겨졌다. 인간의 5대 욕구 중 식욕, 성욕은 생존과 존속을 위한 욕구로서 근본적으로 함께 필요하다 본다. 성욕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 비교적 짧은 기간 필요할 거고 식욕은 나이가 들 수록 약해지긴 하나 좀 더 오래간다 본다. 암튼 둘 다 필요한 만큼이지만 과유불급이다.
- 인터넷에서
가이드는 친절하게 따라붙어 우리에게 사진은 찍지 말라 하며 드문드문 설명도 해 준다. 처음 경험하는 라마교 사원이라 흥미롭게 보고 나오면서 역시 '샹그릴라' 백화점과 대비를 이루는 사원은 '색공불이'를 말한다 싶어졌다. 보이는 형형색색의 온갖 상품들로 소비가 만연한 곳과 공의 세계를 말하는 불교 사원의 대비라니!
인간들의 오온 - 색수상행식을 나타내는 쇼핑몰과 공과 색이 불이임을 말하는 사원 안의 불상들이 뭐가 다를까?
결국 육신을 입고 체험하는 공의 세계란, 본질과 형상이 하나라 일원을 이루며 체험하는 우리네 삶, 곧 인생이 아니던가 말이다. 인생은 영혼이 몸인 육체를 입고 와서 한바탕 웃고 울며 감정 놀이?로 체험하고 가는 한 바탕 꿈이요 한 마당의 펼쳐지는 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원의 설립자인 초이진은 보그트왕의 친동생이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전도에 힘썼고 수많은 제자 학승들을 낳았다. 사원에는 불교 탱화와 금동불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17세기 활불로 존경을 받았던 스님이 손수 만든 거라 한다. 또한 초이진이 열반한 자기 스승의 시신에 순금을 입혀 안치한 등신불도 있다 하나 우리가 갔던 날은 일반 방문객들에게 공개되진 않는지 볼 수 없었다.
이곳도 예전에 한번 불 탄 사원을 다시 재건하였고 한때 구 소련 지지자들의 종교탄압으로 묻을 닫았다가 1942년에 다시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오픈하였다 한다. 아마도 지금은 사원으로서 보다 박물관이니 여러 가지 다양한 탱화, 불교미술품, 탈들이 혼재할 수 있다 여겨졌다.
수흐바타르 광장 한쪽 면은 넓디넓은 인공잔디가 깔려있어 시민들의 휴식처처럼 되고 있다. 수흐바타르 동상 울란바토르에는 한국 가게와 상품만이 아니라 이런 거리도 있다 거의가 다 칭기즈칸의 얼굴인 몽골 투그릭 화폐다. 2만, 1천 투그릭도 색깔만 다른 같은 디자인이라 종종 헷갈렸다. 낮은 단위 두 종류 지폐얼굴은 수호바트로다. 수호바트로의 이름을 따서 '붉은 영웅'이란 뜻의 울란바토르 몽골 국영백화점에서 산 베낭을 메고 가이드 설명듣기 ~ 현대적 건물과 대비를 이루는 초이진 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