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에 만나!
드디어 오늘, 라오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엔 늘 분주하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바쁘겠지만 나의 경우엔 특히 분주해진다는 말이었다.
취미로 기르는 화분들이 하나 둘 모여 어느새 100개가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에 빠지면 끝을 보고야마는 성격 때문이었다.
100개가 넘은 다음부터는 그 수를 헤아리지 않았다.
덕분에 장기간 집을 비우는 날에는 아침부터 땀 흘리며 움직여야만 한다.
4시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8시에 일어났다.
자전거를 타고 서둘러 작업실로 향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옥상에 있는 식물들부터 실내로 옮겼다.
물을 듬뿍 주고 화분받침이 있는 화분들은 받침에도 물을 가득 채워놓았다.
실내에 있던 식물들에게도 똑같이 물을 주고 채웠다.
간단한 일 같지만 개수가 많다 보니 2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만다.
한 여름, 여름의 초록은 그 어떤 색깔보다 생기 있다.
이들에게는 여름이 청춘인 거겠지.
너무나도 생기 있고 아름다운 초록의 청춘이 어쩐지 조금은 샘이 나기도 하여 평소보다 오래 바라보다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
약속 시간은 4시지만 내가 이토록 서두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출발 전 점심에 엄마, 아빠와 식사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엄마가 게장이 먹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고 마침 오늘 아빠도 나도 점심에 집에 있기에 집 근처에 엄마가 좋아하는 게장집에 가기로 했다.
그곳은 당연하게도 맛도 아주 좋지만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가격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춰가면 1인분에 7000원.
양껏 먹고 와도 5만 원이 넘지 않는다.
라오스로 떠나기 전 만찬으로 제격인 셈.
서둘러 작업실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12시부터지만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11시 30분쯤 집을 나섰다.
비 오듯 흘린 땀을 씻어낼 시간도 없이 왜 이렇게 일찍 가냐며 투덜댔지만 12시가 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2시에 맞춰서 왔다면 한참을 서서 기다릴 뻔한 것이다.
의기양양한 엄마의 표정에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앉은 우리는 메뉴를 하나씩 주문했다.
엄마와 아빠는 간장게장, 나는 양념게장이었다.
음식은 빠르게 나왔고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었다. 엄마와 아빠는 자꾸만 내 접시에 간장게장을 발라주었다.
엄마는 엄마몫의 등껍질을 내어주기까지 했다.
우리 부모님은 표현하는 데에 어색한 사람들이다.
낯간지러운 말을 소리 내어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어릴 때에는 그게 참 싫었다.
남들은 심심치 않게 듣는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함께 30번의 여름을 지내보니 깨달았다.
세상엔 사랑해라는 말이 꼭 사랑이 아닐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사랑인 것이 있다는 것을.
사랑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하였나.
단언컨대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매일같이 사랑을 보고 듣고, 만지는 걸.
새벽 공기 가득 넣고 삶아진 식탁 위의 감자에서, 타이머 없이도 늘 아침이면 꺼져있는 선풍기에서,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이 있냐는 전화 속에서, 눈을 맞추면 흔들리는 꼬리 끝에서.
그리고 흰쌀밥 위에 가득 얹어진 간장게장에서 사랑을 마주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 또한 굳이 말하지 않는다.
대답 대신 숟가락을 한 입 가득 입에 넣고 맛있다며 웃는다.
밥을 먹으며 여행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 돌아온다고?”
“16일에 돌아올 거야.”
“거기에 뭐가 있다고 그렇게 오래 있다와.”
“어린 시절의 내가 있지.”
“걔 봐서 뭐 하려고.”
“그냥, 잘 있나 보고 오려고.”
“보기만 하지 말고 간 김에 꼭 안아주고 와. 용돈도 좀 주고.”
“… 나 쓸 것도 없어.”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캐리어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이미 나와 함께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 이곳저곳 상처 투성이인 캐리어.
이번에도 함께 라오스로 떠난다.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2시 30분.
이제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
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설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떨렸다.
불안의 근원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오래된 기억은 머릿속에서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빛바랜 기억은 내 입맛대로 편집하고 미화된다.
나쁜 기억도 너무 쉽게 옅어지고 좋은 기억들만 머리에 남게 되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우리 몸의 생존법칙일 것이다.
그 때문에 좋은 기억들로만 남은 걸까 봐.
막상 도착해 보니 잔뜩 미화되어 추억이라는 옷을 입은 기억과 너무 다를까 봐.
지금 와서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걱정이겠지.
떠나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니까.
막상 가보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곳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인 것은 분명하니까.
공항으로 가는 길은 조금 지루하다.
우리 집에서는 6호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탄다.
늘 사람이 많은 역이라 앉아서 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공항에 가까워질 무렵에야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공항 터미널에 도착한다.
조금 늦게 도착했기에 민아와 민정이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이미 설렘이 가득했다.
설렘은 걱정을 밀어낸다.
무지개가 밀어내는 먹구름처럼.
그들의 설렘은 꽃가루처럼 퍼져 금세 내 코를 간질였다.
세희가 조금 늦을 것이라기에 우리는 먼저 신청해 둔 달러를 수령했다.
30분이 지나고 어느새 1시간이 지났다.
언제까지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먼저 체크인을 하고 있는 도중에 세희가 도착했다.
다행이었지만 시간이 이미 너무 지나버려 남아있는 자리가 별로 없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2명씩 짝을 지어 앉기로 했다.
민아와 세희가 우리의 두줄 앞이라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것도 다행이라며 수하물을 붙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국장을 향해 걸었다.
출국심사는 빠르게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면세점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각한 세희는 벌로 커피를 사겠다고 자처했다.
안 그래도 목이 마른 차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각자 음료 하나씩을 손에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가 4월에 티켓을 예매했으니 꼬박 4개월을 기다려 온 순간이다.
차곡차곡 빈자리에 사람들이 자리에 채워졌다.
저마다의 기대로 웃음 짓고 있는 사람들.
이 많은 사람들을 싣고 5시간을 날아 라오스에 도착할 것이다.
저마다 가슴속에 크고 작은 추억들을 잔뜩 안고 다시 비행기에 오르겠지.
내가 품게 될 추억을 크기를 가늠하며 이륙을 기다렸다.
민정이는 옆에서 벌써부터 창밖 사진을 찍기 바빴다.
언 듯 보니 이미 인스타 스토리에도 여러 장 올라간 듯싶었다.
나는 티켓 사진도 아직인데.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