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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_작은 친절이 만들어 낸 인연

젤리 좀 드실래요?

by 한경환

띠링. 이륙을 위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라오스로 출발이다.

비행기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속도가 조금 붙는가 싶더니 다시 멈춰 섰다.

그렇게 가고 서기를 여러 번.

결국 7시 10분에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는 7시 30분이 다 되어서야 이륙을 시작했다.

여유로운 라오스에서는 시간을 넉넉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명 라오타임이라 불리는.

라오타임이 벌써 시작인 걸까.

그래, 조금 늦어도 괜찮다.

아니, 느려야 맞다.

이건 느린 게 아니라 여유로움일 것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라오스니까.

느림이 여유가 되는 곳, 라오스니까.


점점 엔진소리가 크게 울렸고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쪽부터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맞춰 귀가 멍해지고, 심장이 들썩이는 기분이 든다.

아, 정말 출발이다.

조금씩 떠오르던 비행기는 어느 순간 구름에 숨더니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구름을 뚫고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맞이한다.

아,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다.

붉게 물든 하늘과 바다.

그리고 바다에 서서히 잠기고 있는 태양의 모습까지.

민정이와 나는 번갈아가며 창밖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오직 해가 떠있을 시간에만 찍을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사진을 찍고 나서는 아까 스타벅스에서 샀던 샌드위치를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그때 민정이 옆 자리에 앉은 승객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제 핸드폰으로도 창 밖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통로 좌석에 앉은 그녀의 자리에서는 그 어느 쪽으로도 밖의 사진을 찍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한국인의 자세는 이미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우리의 열과 성을 다한 사진 찍기가 릴스나 숏츠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이곤 했으니까.

나 역시 그런 한국인으로서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옆자리 민정이를 등으로 누르다시피 찍기도 하고 창문에 코를 박기 직전까지 다가가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런저런 구도로 사진을 잔뜩 찍고 나서 돌려줄 때도 확인해 보시고 다시 찍어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그녀는 만족한 듯 웃었다.


잠시 뒤, 물건을 정리하다가 가방 안에서 젤리를 발견했다.

민정이와 나눠먹던 중 옆 좌석분과도 나눠먹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민정이에게 젤리를 한 번 흔들고 옆좌석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민정이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웃더니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젤리를 권했다.

간식거리로 젤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지루한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사진을 찍어줬을 때보다 더 높은음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구름보다도 높은 곳에서 처음 보는 이와 젤리를 나누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다 같이 교수님을 따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냥 교수님 뒤치다꺼리나 하는 거죠 뭐..”


우울한 대사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이왕 할 뒤치다꺼리라면 라오스에서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작은 캔디를 한 통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얼마 전 일본에 다녀오면서 사 온 것이라고 했다.

민정이와 나는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상큼한 맛의 캔디였다.

아주 작은 크기였지만 양이 꽤 많이 들어있었다.

민정이는 이것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비행 내내 조용하게 하나씩, 꽤 자주 꺼내먹었다.

대부분이 잠이든, 불이 꺼진 비행기 안에서도 작게 통을 흔들어 하나씩 꺼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나눠먹은 젤리와 사탕, 그리고 민정이의 새 네일


비행이 중반쯤 접어들 때, 우리 옆좌석 친구가 라면을 주문했다.

작은 소컵이지만 5000원이라는 몸값을 자랑하는 아이였다.

뜨거운 물이 부어진 라면은 금세 조리되어 나왔고 뚜껑을 여는 순간 퍼지는 냄새는 주변 사람들의 코를 벌름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민정이와 나도 냄새 죽인다며 속닥거렸다.

우리의 시선이 부담스러울까 일부러 옆 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있었지만 잠깐 머물렀던 우리의 시선을 느낀 건지 그녀는 컵라면의 뚜껑을 두 번 접어 컵처럼 만들었다.

그 안에 한 젓가락씩 라면을 넣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 입씩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한 입씩이었지만 충분했다.

작은 컵라면에서 두 젓가락의 지출이라면 결코 적지 않았을 텐데. 그 마음씨가 너무 고마웠다.

그냥 민정이와 둘이서만 떠들면서 가거나 눈을 감고 노래를 들으며 갈 수도 있는 비행시간이 또 다른 추억이라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에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소컵 라면을 볼 때나 컵라면 뚜껑으로 만든 컵을 볼 때면 그녀가 떠오를 것이다.

한 입 뺏어먹은 라면 중 가장 맛있었던 한 입으로 기억되겠지.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좋은 기억이 쌓였다.

겨우 한 젓가락의 라면이지만 충분히 든든해졌다.


이제 창 밖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모호해지는 풍경이 펼쳐졌다.

저 어딘가에 있을 경계를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어둠뿐인 풍경에 실망하기는 이르다.

밤비행의 묘미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빛에 있으니까.

작은 불빛들이 모여 만들어낸 풍경들.

저 작은 불 하나에 삶이 담겨있다.

누군가의 이야기인 것이다.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춤을 춘다.

삶은 하나의 풍경이자 흘러가는 이야기이다.

여행은 다른 이야기를 읽어내며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겠지.

나의 작은 불빛이 그 이야기 속에서 함께 빛날 때쯤 이 여행도 끝이 날 것이다.

점점 불빛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삶을 향해 비행기가 조용히 발을 내디뎠다.

이제 하늘에서 본다면 이 비행기도 아주 작은 불빛으로 보일 것이다.

그걸 본 누군가도 우리를 보며 곧 펼쳐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품겠지.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새 책을 펼칠 시간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읽으러 가야겠다.

그들은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리고 나는 어떤 이야기로 빛나게 될까.

이왕이면 아주 밝은 빛이었으면 좋겠다.

밤하늘에서 누군가에게 이정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나는 별.

이미 다 타버려 꺼진 뒤에도 여전히 하늘에서 빛을 내고 있는 어느 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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