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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_밥집 찾아 삼만리

밥 한 끼 해요

by 한경환

꼬르르르르륵.

누구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인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 우리 모두의 배에서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으니까.


점심 이후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정을 넘기기 직전의 시간.

구글맵에 검색되는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뱃속에서는 분명히 배가 고픈 소리가 울렸지만, 내딛는 걸음마다 그 감각이 무뎌지는 듯했다.

공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비엔티안의 밤이 우리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습한 바람, 어둠 속에서도 생동하는 거리의 풍경들, 그리고 사소하지만 낯선 것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어쩌면 비엔티안의 밤이 우리에게 전하는 작은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주변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향기를 풍겼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식물들, 송전탑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무겁게 걸려있는 전깃줄들, 그리고 골목마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는 작은 사원들.

습한 공기와 더위조차도 이 풍경 속에서는 존재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멈춰서 사진을 찍는 시간이 길어졌고 구글맵을 들여다보는 대신 비엔티안의 거리를 살펴보게 되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이 순간을 오래도록 보고 싶어서, 젊음의 한 조각을 이 낯선 도시의 풍경에 담아두고 싶어서.



그러다 마침내, 환하게 불 켜진 한 식당을 발견했다.

길가에 놓인 테이블들,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 듯한 소스통들, 그 더위 속에서도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까지.

선풍기조차 없는 이 작은 공간은 전형적인 동남아의 로컬식당이었다.

테이블 위에 보이는 음식들과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풍기는 냄새는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관광객을 위한 한국어 메뉴판도, 세련된 인테리어도 없었다.

작은 글씨로 쓰인 영어 메뉴를 더듬더듬 읽어가며 간신히 음식을 주문했다.

그러나 마지막 메뉴는 이전과는 다르게 망설임이 없었다.


"And two Raobeer."


라오비어는 이름 그대로 라오스에서 마실 수 있는 맥주이다.

한국에서도 라오스를 생각할 때 이따금 같이 떠오르던 것이 라오비어였다.

특별할 것 없는 맥주였지만, 그 안에는 라오스를 닮은 무언가가 숨어있었다.

너무 강하지 않은 탄산과 밍밍한 듯한 부드러움.

어딘가 모르게 여유롭고 온화한 느낌.

라오스의 사람들의 미소처럼 깊은 인상을 주었다.


여느 음식점이 그러하듯 음식이 나오기 전에 라오비어가 먼저 테이블을 채웠다.

끈적한 팔을 뻗어 병을 집어 들었다.

병 위로 맺힌 물방울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시원했다.

병만큼이나 차가운 잔에 맥주를 가득 따르고 잔을 부딪혔다.


"캬~"


벌컥벌컥 목을 타고 흐르는 라오비어가 더위를 집어삼켰다.

즐거웠다.

덩달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달라붙은 상의를 등에서 떼어내며 투정을 부렸던 우리가 말이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기다렸다.

우리 주변에는 길고양이들이 코를 킁킁 대며 지나갔고 이따금 천장이나 벽에 도마뱀이 빠르게 기어갔다.

바보 같은 농담에 웃음을 터트렸고 옆 테이블에 있던 한국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평범한 대화 속 평범한 행복이 지나갔다.


어느새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이 차례로 테이블을 채웠다.

볶음면 요리 하나, 볶음밥 하나, 민정이와 민아가 직접 가서 보고 골라온 이름 모를 딤섬 2 접시.

라오스에서의 첫 식사로 완벽한 한 상이었다.

배고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안을 가득 채우는 음식들은 모두 취향저격이었다.

탱글한 면발, 소스를 가득 품은 볶음밥, 육즙이 잔뜩 흐르는 딤섬까지.

아무거나 고른 건데 어떻게 이렇게 잘 골랐냐며 서로를 칭찬했다.

함께 나온 국물도 구수하게 깊은 맛이 났다.

동네의 오래된 떡볶이 집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어묵국물의 그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계산대로 걸어가 계산을 했다.

우리는 이 행복한 시간의 값으로 180,000낍을 지불했다.

한화로 약 12,600원.

이곳에서는 어디서든 지불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우리가 걸어온 거리가 꽤 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걷는 내내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날씨가 덥다고 툴툴거리거나 시간이 늦었다며 딴지를 걸지도 않았다.

여행에 있어 좋은 동반자는 마음이 잘 통하는 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했고 기분을 헤아리려 애썼으며, 배려했다.

아마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동안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미 서로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었으니.


숙소로 돌아가기 전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당장 필요한 것은 없었지만 간식거리를 좀 살 겸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분명 간단하게 먹을 것만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막상 들어가니 다들 마음이 바뀌었나 보다.

같은 마음인 것은 좋지만 이런 것까지 같은 마음일 건 없잖아.

각자 음료도 하나씩 고르고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골랐다.

과자 한 봉지와 내일 먹을 멜론맛 요플레도 독특하다는 이유만으로 4개를 담았다.

계산 대 앞에서 찍힌 금액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170,000낍.

“얘들아, 우리 방금 전 식사로 180,000낍 냈던 거 알지..?”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물고 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볼도 좀 가라앉았고, 더운 공기 뒤로 불어오는 밤바람도 느낄 수 있었다.

얇은 봉지와 함께 바스락 거리는 과자소리도, 어디서 들리는지 모를 풀벌레 소리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민정이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한데 모여 순간을 만들어냈다.

평범한 특별함.

정반대에 놓인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었다.


작고 평범한 순간들이 모여 찰나의 행복을 이루었다.

청춘은 아마 이런 순간들의 조각이 아닐까.

소란스럽고 특별한 순간이 아닌, 아무렇지 않은 평범함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순서를 정해 샤워를 했다.

사 온 과자를 뜯었고 옷을 갈아입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가장 넓은 침대에 모두 모여 과자를 먹었다.

바보 같은 이야기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오갔고 그런 와중에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거리도 수면 위로 잠깐씩 얼굴을 내밀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민정이의 진심이 가득 섞인 장난스러운 말도 빠지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민정이의 말버릇 같은 것이었다.

입으로 뱉어내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던데.

그 바람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민정이가 부자가 되면 맥북 하나 사준다는 약속을 진작에 받아두었다)


이윽고 불을 껐다.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고 하루의 마침표가 찍혔다.

하지만 우리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꺼진 불이 무색하게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일정이 끝난 뒤 누워서 떠들던 어린 날의 수학여행 같았다.

아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잠이 들만 하면 들려오는 소리로 눈이 다시 떠지기 전까지는.

아, 이것마저도 그 시절과 비슷하려나.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지 잠시 헷갈려하다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순간들.

그 기억들이 내일이 되더라도 그 빛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잘 자, 얘들아.

잘 자, 비엔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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