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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_비엔티안의 새벽공기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by 한경환

‘부스럭, 부스럭’


반갑지 않은 낯선 소리에 새벽의 고요가 깨졌다.

알람보다 훨씬 이른 시간, 어수룩한 하늘에 더듬거리며 찾은 휴대폰 화면의 숫자는 6시 31분.

우리가 눈을 감은 시간이 3시 반 즈음이니 딱 3시간 만에 눈을 뜬 것이다.

8시 반까지 푹 자고 조식을 먹자던 약속은 방금 꾸었던 꿈처럼 물거품이 되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침대에 앉아 가방을 뒤적거리는 세희였다.

낯선 땅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잠을 설친 듯 보였다.

그다음 눈길이 닿은 건 커다란 창틀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었다.

잔잔하게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라오스의 아침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그림은 새벽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내기에 충분했다.

이왕 깨어버린 아침,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눈을 뜬 사람이 세 사람이 되기 전에 말이다.

어두운 복도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호텔 밖으로 나온 순간, 비엔티안의 모습이 한결 선명하게 느껴졌다.

신선한 공기가 새벽을 열고 있었고, 새소리가 투명한 강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새벽의 기운.

새벽 공기 속을 향유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세희도 내내 아무 말이 없었지만 평온해 보였다.

발끝에서 일렁이는 물길을 따라 걸으며 비엔티안의 새벽을 코로, 눈으로 천천히 삼켰다.

낯선 땅이지만 우리가 마주한 이른 아침만큼은 익숙한 위로가 되어주는 듯했다.

꽃잎 하나,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는 소리마저 귓가에 닿았다.

이름 모를 나무에서 피어난 꽃향기를 맡았고 지렁이가 만들어낸 발자취를 따라 걷기도 했다.

이 무소음의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 멀리 붉은색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를 보며 뭐라 말을 건넸지만, 알 수 없는 언어였다.

새벽부터 길가에 서서 무언가를 나누어 먹는 이 생소한 모습은 우리의 발길을 잡아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치 우리가 가던 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뭐라 말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은 우릴 향해 웃어 보였다.

아주 순박한 미소였다.

순박한 미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어 이상의 것을 전할 수 있다.

그 미소에 잔뜩 경계했던 마음이 금세 풀어졌다.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오래된 핸드폰을 건넸다.

아마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서서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다.

누군가는 이빨이 다 보이게, 또 누군가는 조금 수줍은 듯이, 각자 다른 모습이지만 행복한 얼굴로 사진에 남았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세희를 끼워 넣고 몇 장 더 찍었다.

언젠가 사진을 볼 때 이날이 기억날 수 있게.

그들도 우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국이라는 곳에서 온, 잔뜩 부은 얼굴로 사진을 찍어주던 이상한 여행자들로.

떠오르는 해와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새벽보다는 아침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에 맞춰 길에는 아침 식사용 빵을 파는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보였다.

그중 한 가족이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빵을 나눠먹고 있었다.

그들의 아이 중 한 명은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가 그려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면서도 그 옷을 골라 입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귀여움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으며 엘사를 부르자 다른 아이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웃음처럼 번지기 쉬운 표정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간질거리는 웃음은 재채기처럼 참기 힘들다.

우리는 강가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어느덧 시간은 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라오스의 습기가 조금씩 피부에 닿기 시작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호텔로 돌아가는 아침공기에서 머릿속을 스친 것은 놀랍게도 “청춘"이었다.

대학 시절에도 밤새 작업을 하고 이른 첫차 시간에 세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청춘이란 무엇을 하던 그것을 처음처럼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닐까.

이 순간, 이 길 위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낯설고 설레는 건 우리가 아직 그 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호텔에 돌아오니 민정이가 깨어있었다.

민아는 아직 꿈나라인 채였다.

조심스럽지 않게 민아를 흔들어 깨웠다.

한 시간 넘게 산책을 즐기고 온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조식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이동했다.

2층에 도착하기도 전에 구수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일어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은 민아는 자리를 잡기도 전에 그릇을 먼저 집어 들었다.

우리의 하루는 그렇게 각자의 취향으로 그릇을 채우는 일로 시작되었다.

밥 조금, 면 조금, 고기, 소시지, 샐러드.

내 입맛대로 채워진 그릇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긴 산책 후에 마주한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한 숟가락씩 입으로 들어올 때마다 새벽의 풍경과 냄새, 걸었던 길 위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곳 비엔티안에서 보내는 순간들은 낯설지만 따뜻했다.

작은 접시에 놓인 음식들처럼, 이곳에서의 시간도 나의 선택으로 취향껏 채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보내온 청춘이라는 시간도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채로 한 발짝씩 내딛는 것.

완벽할 필요도 없고, 성공할 필요도 없다.

실패라면 어떠한가?

다시 새로운 접시에 새로운 음식을 담으면 그만인 것을.

그저 오늘이라는 날을 충실히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시간들이 모여 청춘으로 흘러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테이블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각자의 취향대로 담은 접시를 함께 먹었다.

세희와 민정, 민아. 각자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들.

나의 빛나던 그 순간들을 함께 보낸 친구들.

청춘은 나 혼자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나누는 사람들로 인해 더욱 빛이 난다.

그날 아침, 우리가 나눈 대화는 많지 않았다.

어딘가 조금은 바보 같은 이야기들도 오고 갔다.

하지만, 묵묵히 서로의 선택을 지켜봐 주는 그 편안함 속에서 나는 청춘의 조각 하나를 어렴풋이 본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후식 과일을 먹지 않고서는 조식을 먹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과일의 상큼함이 아침 산책의 피로를 지워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호텔방으로 돌아오는 길, 민정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고 민아는 잠이 쏟아지는 듯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또다시 각자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다음 일정까지는 아직 몇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긴 산책과 아침 식사로 가득 채운 오전의 시간.

그 여운이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순간들이 하루하루 우리의 젊음을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다는 것을.

비엔티안의 따사로운 공기와 평화로운 아침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신의 청춘을 알아가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우리는 잠시 각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배가 부르니 피곤함이 몰려왔고 방안에는 나른함이 감돌았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문틈을 타고 들어와 묵직한 공기 속에 부드럽게 흩어졌다.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이 순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느긋함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체크아웃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우리는 여유에 휘감긴 몸을 일으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을 싸는 동안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민정이는 작은 캐리어에 짐을 억지로 구겨 넣었고, 나는 쓸데없이 챙겨 온 짐들을 민아의 캐리어에 몰래 넣고 있었다.

우리가 보내온 젊음이라는 시간들도 이런 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정답도 없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그 안에 나름의 질서와 따듯함이 배어 있는 순간들.


체크아웃을 마치고 우리는 호텔 로비에 짐을 맡겼다.

비엔티안의 뜨거운 공기가 이른 아침의 선선함을 밀어내고 있었다.

뜨거운 공기를 피해 우리가 향한 곳은 산책길에 보았던 "카페 아마존"이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라오스의 무더위는 우리의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습한 공기가 피부를 덮었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카페에 도착해 음료를 주문하기도 전에 에어컨의 부재가 먼저 느껴졌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 좀 났겠지 싶어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얼음을 가득 넣은 음료와 각자 하나씩 들고 있던 손선풍기의 작은 바람이 그 순간만큼은 커다란 위로로 다가왔다.

더위와의 사투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웃음을 멈추는 법이 없는 라오스 사람들처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무더위 속에서, 우리는 이상하게도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더위가 가시고 숨통이 트이자 대화가 오갔다. 아직 버스 시간까지 1시간 반정도 남아있었고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동남아는 마사지 아니겠어?”


민아의 말이었다. 그 말에 우리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지에서의 마사지는 더위와 피로를 잊게 해 줄 완벽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근처의 마사지샵을 검색했다.

가격이 적당하고 후기가 좋은 곳을 골랐다.

그렇게 고른 곳은 숙소와도 가까워 이동하기에 부담이 없는 곳이었다.

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동안 더위를 피해 달아나듯 마사지샵으로 향했다.

숨을 곳 없이 펼쳐진 길 위의 햇빛 아래 선명한 그림자 속에서 우리의 청춘이 조용히 춤추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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