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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_나비의 마사지

나비처럼 날아

by 한경환

앞다투어 마사지샵 안으로 들어선 순간, 천국이 펼쳐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풀가동된 에어컨 바람 하나만으로도, 우리를 단숨에 더운 현실에서 천국으로 데려다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얼음이 띄워진 시원한 웰컴티를 마시며 축축했던 몸과 마음을 식힌 뒤 마사지 코스를 골랐다.

라오 마사지 60분, 1인당 11만 낍.

한화로 약 7700원이었다.

이토록 합리적인 가격에 한 시간 동안 천국을 누릴 수 있다니,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짐을 내려놓고 따뜻한 물에 발을 담갔다.

몸을 식히고 난 뒤라서 그런지 따뜻한 물에 몸이 금세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족욕은 짧았지만 정성 가득한 순간이었다.

마사지사분은 작은 손으로 스크럽을 덜어내 발바닥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고, 물기를 닦아내는 손길에서도 조심스러운 따뜻함이 느껴졌다.

족욕을 마친 뒤, 2층으로 이동해 프리사이즈의 엄청난 크기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본격적인 마사지가 시작되었다.


눈을 감은 채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마사지를 받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다리를 주무르던 손이 어느새 어깨를 만지고 있었고, 어깨를 누르던 손이 다시 허리를 풀어주고 있었다.

소리도 없고,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나비 같았다.

내 주변을 부드럽게 날아다니는 나비는 지나간 자리마다 묵직했던 근육을 부드럽게 바꾸어냈다.


중간중간 민아인지 민정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방에서 윽, 하는 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왔다.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이내 나른함에 몸을 맡겼다.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져 비몽사몽해 졌을 때쯤 그녀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사지가 끝난 줄 알고 일어나 앉았고 그때 마무리 마사지가 이어졌다.

몸을 조금씩 비틀어 풀어주었고 내 등을 팡팡 두드리고 나서야 마사지가 끝이 났다.

몽롱한 정신으로 연신 땡큐를 외치며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커튼을 젖혀보니 모두가 비슷한 얼굴이었다.

잘 잔 듯 살짝 부은 얼굴과 발그레한 볼, 그리고 기분 좋은 미소까지.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다시 의자에 앉아 따뜻한 티 한 잔을 마셨다.

풀어진 근육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기운이 노곤한 몸을 더 편안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이 느긋함을 충분히 즐기며 한 컵을 다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가 도착하기 15분 전, 마사지샵을 나섰다.

호텔 앞에는 이미 버스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방비엥까지 데려다 줄 버스


호텔에서 캐리어를 꺼내 들고 바로 버스로 향했다.

우리의 캐리어를 차에 싣는 동안 아까 봐두었던 벽에서 사진을 찍었다.

빈티지한 느낌이 가득 담긴 벽이라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거기서 서로를 찍어주던 나와 세희를 본 호텔 직원분이 달려와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괜찮다는 거절에도 그는 노프로 블롬을 외치며 핸드폰을 받아갔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준 뒤 꽤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건넸다.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핸드폰을 받아 들고 버스에 올랐다.

드디어 방비엥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바로 방비엥으로 떠나는 줄 알았던 버스는 비엔티안 시내를 돌아 몇 명의 승객을 더 태웠다.

버스에 가득 사람을 싣고 나서야 방비엥으로 출발했다.

저마다의 계획들과 기대를 가득 실은 버스는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빠져나갔고 어느새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5년 전에 내가 왔을 때는 방비엥으로 출발할 때 무조건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다.

방비엥까지는 5시간 정도 걸렸기에 그때 출발해야 점심쯤에 방비엥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중국에서 고속도로와 기차역을 만들어냈다.

물론 시간도 단축되었고 훨씬 편해졌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과거의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했었다.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웃던 것, 처음 보는 사람들과 여러 언어로 나누었던 짧은 대화들, 휴게소에서 사 먹었던 간식거리.

여행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던 순간들을 함께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발전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발전과 발달이 꼭 좋은 쪽으로 이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충분히 편리하고 편안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제는 무분별한 발전보다는 공존에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웃던 때에도 우리는 불편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했을 때 불편할 뿐이지.

흔들림 없이 편안한 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민정이와 세희는 앞자리에서 이미 잠에든지 오래였다.

하지만 내게는 할 일이 있었다.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으로,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돌아오는 2가지 기차를 예매하는 일이었다.

이 티켓은 열차 출발일 기준 3일 전부터 예약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예약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오늘이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열차를 예매할 수 있는 첫날이었다.

여러 후기들을 찾아봤을 때 트래블 카드를 발급받으면 가능하다, 비자카드가 있으면 가능하다, 중국 결제 시스템으로만 가능하다 등의 여러 의견들이 있었다.

그래서 카드를 종류별로 챙겨 왔고 트래블 카드도 발급받아왔다.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결제창에 카드를 입력했다.

결제가 불가능하다는 알림이 화면을 채웠다.

하나씩 실패한 카드들이 늘어날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챙겨 온 마지막 카드마저 실패했다는 알림을 보내왔다.

적어도 이 많은 카드들 중 하나 정도는 결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깊은 한숨에 민아가 일어났다.

민아와 함께 다시 차근차근해봤지만 실패가 계속되었다.

라오스 유심을 이용해 라오스 현지번호를 발급받아 결제를 해보아도 실패.

그때 창밖에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이야기가 이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창밖의 비는 내 안의 분노에 부채질을 했다.

민아의 손선풍기 바람이 내 얼굴의 열을 식혀주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전해 보고 안된다면 깔끔하게 포기하자.

다시 어플을 켜고 수십 번은 클릭한 날짜와 시간을 누르고 마찬가지로 수십 번은 입력해 이미 외워버린 카드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될 대로 돼 라지 뭐.

기차가 인기가 많아 매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지만 어떻게든 굴러가는 게 여행 아닌가.

이 역경을 헤쳐나가는 것 또한 여행의 일부일 것이라며 그제야 비 내리는 라오스의 바깥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어지럽고 시끄럽던 내 마음속과는 다르게 라오스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비가 쏟아지면 그저 비를 맞았고 비가 그치면 조금씩 물기를 털어냈다.

비를 피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래, 쏟아지는 비 좀 맞으면 어떠한가.

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다.

언젠가는 그칠 것이고 그땐 해가 떠오를 것이다.

영원한 비가 없듯, 영원한 햇빛도 없다.

우리는 그냥 내리는 비를 받아들이고 내리쬐는 햇빛에 몸을 말리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비 좀 맞지 뭐.

곧 떠오를 해를 기다리며 내리는 비에 몸을 맡겨야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그 흐름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앞으로 나아가야지.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 때문인지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무섭게 쏟아지던 비는 그쳐있고 먹구름들 사이에 햇빛이 커튼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톨게이트 진입로가 보였다.

그 위로 선명하게 '방비엥'이라는 글자도 눈에 띄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곧 내 청춘이 빛나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이번 여행을 계획하게 만든 곳.

얼른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내 두 발로 이곳의 땅을 밟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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