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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_오랜만이야, 방비엥

그때 그 호텔

by 한경환

드디어 버스에서 내려 땅을 밟았다.

차에 오른 지 2시간 만이었다.

도착의 기쁨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그보다 먼저 방비엥의 공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비엔티안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숨을 들이켰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에는 비에 젖은 흙내음과 나무의 푸르름, 그리고 이국적인 낯섦이 뒤섞여 있었다.

방비엥의 거리는 5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고 소박한 시골길 위로 가벼운 차림의 여행객들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맑은 웃음을 터뜨리는 현지의 어린아이들이 지나가고, 길 끝으로는 그림 같은 돌산이 멋지게 펼쳐져 있었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과 풍경은 거의 그대로였다.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울퉁불퉁한 길 위를 걸었다.

툭툭 운전자들이 부르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혀를 내두르고는 그냥 걸어가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숙소까지도 직선으로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되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길을 걸으며 눈에 담긴 풍경들은 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돌담 위에 피어난 촉촉한 이끼, 이국적인 식물들, 처음 보는 낯선 모양의 꼬치구이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생경한 과일들.

천천히 가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첫날 택시에서 배웠다.

우리는 그에 맞춰 천천히 걸었고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담았다.

캐리어를 끌고 약 15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우리가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콘페티 가든 호텔.

이곳은 내가 5년 전 처음 방비엥에 왔을 때 머물렀던 바로 그 호텔이다.

후기를 통해 최근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건물을 완전히 새로 지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사랑했던 그 작은 수영장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호텔 가까이 다가서자 직원분들이 나와 우리의 캐리어를 받아주었다.

체크인을 위해 내 이름을 말하자 갑작스럽게 그는 너무 미안하다며 사과를 전했다.

나의 날짜 변경 이메일을 너무 늦게 확인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이 호텔은 내가 5년 전에 처음 여기 왔을 때 머물렀던 호텔이에요.”


내 말을 들은 직원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으며 나의 인스타그램 첫 번째 피드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이 호텔의 수영장에서 찍었던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클릭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우리의 방을 가장 좋은 방으로 업그레이드를 해주었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라오스 여행에서 생긴 또 다른 뜻밖의 행운이었다.


안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니 정말 멋진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넓은 방에는 퀸 사이즈 침대와 싱글 침대 두 개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화장실도 널찍했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1명이 간이침대에서 자야 했던 상황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우리는 감탄을 연발하며 각자 침대를 정한 뒤 짐을 풀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곧장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우리의 체크인 담당 직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 우리의 방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한 뒤에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구매할 수가 없어서 대신 구매해 줄 수 있냐고 물었고 그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기차표도 필요하면 함께 구매해 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 혹시 그는 천사인 걸까.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여권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했고 나는 가방에서 우리 4명의 여권을 꺼내 주었다.

티켓은 내일 전해주겠다며 더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으니 필요한 것이 있을 리가.

또다시 앵무새가 되어 땡큐를 외치며 방으로 올라왔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가 너무 쉽게 해결된 것에 대해 다들 안도했다.

이제 불편한 마음 없이 방비엥을 실컷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막 짐을 풀었기에 한 시간 정도 쉬었다가 방비엥을 구경하기로 했다.

하지만 쉬는 동안에도 가만히 누워 있을 리 없었다.

창문가 침대에 앉아 펼쳐진 멋진 풍경을 배경 삼아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사진이라는 것은 아무리 찍어도 모자란가 보다.

쉬기로 한 시간에 절반 이상을 사진에 쓰고서야 카메라가 쉬어갈 수 있었다.

사진 찍기, 그다음은 뭘 입고 나갈까였다.

서로 가져온 옷들을 꺼내놓고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는 것이 어린 시절의 동생들을 보는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성의껏 고른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섰다.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째 우기라면서 비를 보기가 힘들다 싶었다.

이렇게 나가자마자 비가 오다니.

하지만 우리도 비가 좀 온다고 쉽게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라오스 준비물에 우산과 우비를 상단에 적어두었던 사람들이다.

모두 다시 올라가 우비를 입고 우산을 챙겼다.

우비를 하나 입는데도 그냥 입는 법이 없다.


“얘들아, 사실 내 우비는 핑크색 땡땡이야.”

“엇, 내 거는 초록색 땡땡이야!”

“내 건 하늘색인데!”


“… 내 건 짱멋진 판초우의야.”


우리는 각자 챙겨 온 우비를 서로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애써 고른 옷이 우비에 가려졌지만 즐거움만 더 커졌다.

이제 정말 밖으로 나갈 차례.

쏟아지는 빗속을 우비를 입은 채 걸어본 게 얼마만이던가.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웃음이 나왔다.

비가 이렇게나 쏟아지는데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흠뻑 젖은 땅이 깨끗해지 듯 청춘이라는 글자에 쌓인 먼지도 조금은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쏟아지는 비와 그 빗속을 친구들과 우비를 입은 채 함께 걸었던 것.

앞머리를 적시고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빗속에서도 함께 걸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를 향해 내리는 비를 보면서도 서로의 우비를 자랑하며 장난을 치고, 젖어드는 풍경 속에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 이들.

혼자가 아닌, 서로의 곁에서 세찬 비마저도 즐길 수 있던 시간들.

언젠가 겪을 장마철에, 쏟아지는 비를 피할 길이 없을 때 문득문득 떠오를 것만 같은 장면이다.


“멍 때리지 말고 빨리 와.. 배고파.”


멍 때린 게 아니라 감상에 젖은 건데…

하지만 다들 이미 한참은 앞서나갔기에 나의 변명을 들어줄 이는 없었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며 빗속에서 만든 빛나는 기억들을 계속해서 기록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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