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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_비 온 김에 취해보자

우연히 운명처럼

by 한경환

숙소에 돌아온 지 30분 만에 우리는 다시 나가기로 했다.

그 유명하다는 ‘사쿠라바‘에 가기 위해서였다.

라오스에 도착하기 전부터 세희가 굉장히 가고 싶어 했던 곳이다.

클럽을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사쿠라바에서 하는 특별한 이벤트 때문이었다.

술 2잔을 주문하면 티셔츠를 한 장 주는 이벤트.

기어코 4장의 티셔츠를 받아 함께 입어야겠다는 말이었다.

티셔츠를 얻기 위해 8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니.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계획이었지만 그래서인지 마음에 드는 계획이었다.

무모했던 청춘의 한 때를 다시 보기 위해 달려온 우리에게 어울리는 계획 같았다.

단단했던 의지는 시끄럽고 정신없는 내부에서 한 번, 다소 민망할 정도의 노골적인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트랜스젠더 누나(?)들의 눈빛에 한 번, 그리고 이벤트로 준다는 티셔츠가 우리가 기대했던 검은색 반팔이 아닌 망고나시인 것에서 완전히 꺾여버렸다.

망고나시라니.

한국에 있을 때는 물론 그 어떤 여행지에서도, 심지어는 집에서조차 입어본 적이 없다.

예상밖의 반전에 우리는 더 머뭇거릴 것도 없이 가게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음, 역시 우리랑은 잘 맞지 않는 곳이군.


우리는 좀 더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술집을 찾아 움직였다.

다음 목적지는 좀 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비바 펍’이었다.

하지만 그곳 또한 우리가 원하던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길을 헤매고 있던 그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까 환전할 때 사장님이 추천해 주었던 술집 거리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서두른 것은 우리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 거리에 닿기도 전에 엄청난 폭우를 만나버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거대한 물벽이 앞을 가렸다.

무섭게 쏟아붓는 빗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매장으로 무작정 들어가는 것.

가게의 이름조차도 모른 채로 다 같이 뛰어들어왔다.

언 듯 보니 술집 같았다.

널찍한 당구대도 있는 것을 보니 우연히 들어온 것 치고는 제법 잘 찾아온 것 같았다.

1층에는 우리뿐이었다.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술집.

딱 우리가 찾아 헤매던 곳이 아닌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이름만 보고는 맛을 알 수 없는 칵테일들이 수두룩했다.

각자의 감으로 칵테일을 하나씩 골랐다. 나는 바로 앞에 흐르는 강의 이름인 남송 칵테일을 골랐다.

술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당구를 치기로 했다.

포켓볼이 처음이라는 민정이와 세희를 한 명씩 맡아 팀을 짰다.


우리가 한참 포켓볼에 빠져있을 무렵, 음식과 함께 칵테일이 나왔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각자 자리에 앉아 본인 앞의 유리잔을 집어 들고 홀짝였다.

어떤 것이 누가 시킨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손이 가는 대로 잔을 집어 들었다.

함께 시킨 윙봉도 입에서 살살 녹았다.

포켓볼을 치다 목이 마르면 자리로 돌아와 술을 홀짝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침묵이 흐를 때면 그 적막을 빗소리가 부드럽게 채웠다.

그렇게 우리는 비와 시간을 함께 음미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 앉아있자던 우리는 그렇게 멈출 줄 모르는 폭우 속에서 한참이나 술을 마시며 비와 함께 대화했다.

가끔 빗소리에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있었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테이블을 옮겨야 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불편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더 집중하거나, 대화를 잠시 멈추고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면 되었고 더 멋진 자리를 찾아 이동하면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라오스에 스며들고 있었다.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어느덧 우리가 가게에 들어온 지도 2시간이 다 되어갔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내일이 바로 그토록 기대하던 액티비티를 종일 즐기는 날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리는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초초함이 깊어졌다.

가게 사장님께 택시를 잡아줄 수 있는지 부탁해 보았지만 그 어떤 택시도 이 비를 뚫고 우리에게 와주지 않았다.

그 사이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었다.

한 잔만 더 마시면 비가 그치겠구나 생각한 것도 잠시 요란하게 천둥이 치더니 다시 거세지는 빗줄기였다.


“그냥 비 좀 맞고 가자!”


때마침 가게의 마감시간도 다가왔고 아까보다 한풀 꺾인 비의 기세에 냅다 던진 말이었다.

아무래도 비는 그치지 않을 것 같았고 칵테일 때문인지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들어간 칵테일만큼 채워진 용기가 모험심으로 타올랐다.

고민하는 것도 잠시 다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방이 마감했으므로 더 이상 주문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계산을 마치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들렀던 숙소에서 짐스럽다며 우비와 우산을 내팽개치고 가벼운 차림으로 출발한 우리를 원망하면서.


“우리 저거라도 쓰고 가자.”


누군가가 외친 말이었다.

‘저거’가 무엇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건네받은 그 무언가로 비를 막았다.

받고 보니 ‘저거’는 누군가가 쌓아둔 스티로폼 뚜껑이었다.

버리려고 쌓아둔 것인지 모아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그곳에서 한참이나 걸어온 뒤에야 하게 되었다.

다 큰 성인 4명이 쏟아지는 빗속을 스티로폼 뚜껑을 쓰고 걷고 있었다.

이 장면이 너무 우스워서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꽤 즐거웠다.

동남아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시원한 공기, 내리막 길을 따라 흐르는 물을 밟는 감촉.

소중했던 어릴 적의 한 기억이 겹쳐져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이 재미있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다.

빗소리를 뚫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츰 그 웃음과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우리가 만드는 즐거운 발걸음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우리는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를 맞아서 행복했다.

비를 맞았기 때문에 좋은 기억이 하나 더 늘어났다.


숙소 근처에 온 우리는 이대로 들어가기가 아쉬웠다.

마침 숙소 근처에 로드 마사지샵이 눈에 띈 것은 운명이었을까.

짧은 회의로 간단한 발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릴리는 없지.

늦은 시간의 마사지사들은 굉장히 피곤해 보였고 그들의 손길에는 성의가 없었다.

그녀들은 무성의 한 손길과 더불어 옆 자리 직원과 웃고 떠들기 바빴다.

결국 참지 못한 것은 민아였다.

몇 번 주의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아의 마사지사는 옆자리 동료와 떠들었고 그녀의 마사지는 겨우 민아의 다리를 쓰다듬는 수준이었다.

한참의 대화가 오갔고 결국 원래 지불하기로 한 가격의 절반 정도만 내고 가게를 나와버렸다.

그냥 바로 숙소로 갈걸. 하지만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저 비가 왔다가 해가 들어서고 다시 비가 왔을 뿐이다. 우리네 인생처럼.


숙소로 돌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내일의 조식시간은 7시.

우리는 8시에 액티비티를 위해 보내준 차를 호텔 앞에서 타야 했다.

밤새 떠들었던 어제와는 다르게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을 위해 체력을 아껴두는 것일까.

내일 출발할 때 챙겨갈 가방을 미리 싸두었다.

벌써 라오스에 도착하고 두 번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가장 걱정했던 것은 사실 비였다.

우리가 떠나는 시기가 딱 우기의 중간이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 중에 비를 맞닥뜨려 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더 걱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걱정한 것에 비해 우리는 괜찮았다.

사실 오늘은 더 좋았다.

어쩌면 나쁜 일 뒤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온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쁜 일이 생겨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


끝없이 내리는 비가 없듯 끝없이 햇빛만 내리쬐는 날도 없을 것이다.

가끔은 비가 오랫동안 오는 날이, 또 언젠가는 해가 오래 뜨는 날도 있을 것이다.

너무 오래 비가 오는 날에는 무작정 빗속으로 달려가 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해를 기다리는 것보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머리에 얹은 스티로폼 하나로 한참 골머리를 앓던 비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버린 오늘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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